한인 최초 美 선출직 판사

“코리안드림 꿈꾸는 동포 돕고 싶어 변호사 됐죠”
성전출신 박재승 전 대한변협회장등과 친밀한 교류

군동 내동마을 출신이면서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의 선출직 판사로 활동하고 있는 채동배(81) 변호사가 10년만에 고국을 찾았다. 채변호사는 지난 12일 모교인 전남대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났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서울에서 주최한 ‘제14회 한국문학 번역 출판 국제워크숍’에서 기조강연을 마친 후 내친김에 전남대를 찾았던 것이다.

채변호사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과 담하나를 두고 살았던 이웃 친구사이로 어릴적부터 영어를 잘했다. 군동초등학교를 22회 졸업하고 순천으로 유학을 가서 전남대학교에 진학했다. 지난 1995년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텍사스주(州) 델라스 시(市) 법원 판사로 선출돼 현재까지 법정에 서고 있다. 시민투표를 거쳐 판사를 선발하는 미국에서, 한인 최초의 선출 판사다.

35년째 미국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그는 애초부터 법학 전공자는 아니었다. 1960년 전남대 영어영문학과를 거쳐 미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모교에서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5년간 전남대 강단에 섰던 그는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대에서 문학박사 과정을 밟은 후 미 태런트 카운티 칼리지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학생을 가르쳤다. 결국, 1974년 미국 이민자가 됐다. 고향을 떠나 미국이라는 땅에서 차별받고 있는 한국 동포들을 돕고 싶었던 그는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서던메소디스트 대학교 로스쿨에 도전해 3년 뒤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건물주에게 쫓겨난 상인들의 조력자가 됐고, 미국법을 모르는 한국인들을 위해 영주권과 시민권 취득은 물론 매매계약서 작성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당시 한국인 변호사가 없었던 시절이라 그는 ‘이민자들의 아버지’로 불렸다.

채변호사는 델라스 인근 토프워스에서 처음으로 한인회를 창립했다. 이곳은 공군기지가 있어 미군과 국제결혼을 한 한인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돕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1985년에는 미국에서 첫 호남향우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호남향우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최근 귀국하자마자 성전 오산마을 출신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회장을 서울에서 만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재승 회장과는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박회장이 미국에 가면 채변호사가 진행하는 재판도 지켜봤다고 한다. 채변호사는 “오랜만에 귀국해서 고향마을에 가보고 싶지만 일정상 가지 못해 아쉽다”며 “어릴적 뛰어놀던 탐진강변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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