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이 강진에 남긴 마지막 참사 김현구 죽음

영랑 죽음 한달 후 지금의 강진고 자리서 생 마쳐
현구·영랑, 6. 25가 남긴 서정시인들의 슬픈 역사

김성옥의 손가락 신호를 받은 이성삼이 군중속을 헤치고 들어가 현구선생과 강진세무서과장, 금릉중학교 음악선생을 데리고 나왔다. 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군중속에 있던 사람중에 이성삼이 이들 세명을 데리고 가는 것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김성옥의 위세를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성삼은 세사람을 데리고 서문정 사장나무를 지나 낙하정을 돌아서 공동묘지가 있는 지금의 강진고등학교 자리로 데리고 갔다. 김성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사람을 데리고 간 것은 이성삼 뿐이였다. 공동묘지에는 전쟁이 한창이던때 만들어 놓은 반공호 비슷한 진지가 있었다.

묘지들을 방패삼아 뒤쪽에 구덩이를 파 놓은 형태였다. 이성삼은 데리고간 세명을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렸다. 그러더니 미리 준비했던 장작을 이용해 세사람의 뒷머리를 차례로 내려쳤다. 한명 한명이 맥없이 구덩이로 내려 떨어졌다. 현구선생이 목숨을 잃은 마지막 장면이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서정시인 김현구는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다음날 김성옥과 이성삼은 강진을 떠났다. 현구선생의 시신은 한참 후에야 가족들이 수습했다. 강진을 떠난 김성옥과 이성삼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을 하다가 사살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현구선생의 죽음을 이렇게 장황하게 기술한 것은 그동안 일정하게 확립된 현구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현구선생의 연구들이 진행되는데 있어서 작은 자료가 되길 바란다.

또, 본격적인 현구선생의 삶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또 한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 정리하고자 한다. 다름 아닌 현구선생의 절친한 친구이자 강진이 낳은 서정시인 김영랑의 마지막 상황이다. 영랑선생은 6.25때 서울에서 북한군의 폭격 포탄파편에 맞아 사망했다는 막연한 상황이 전해졌지만, 영랑선생이 피란생활을 하다 포탄을 맞은 며칠 후 마지막 숨을 거둘때까지 곁에 있었던 그의 9촌 동생뻘인 김현승(미국거주)씨가 <강진일보>에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 정립됐다.

영랑선생은 전쟁이 나자 서울 신당동 김현승씨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보름 정도가 지난 1950년 9월 23일의 일이였다. 오후 3시에서 4시정도 된 시간이었다. 서울 신당동 주택에 갑자기 포탄 한발이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포탄이 떨어진 지점은 동쪽 부엌앞 담장이었다. 부엌앞 처마밑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영랑선생과 현승씨의 둘째 형이었던 현영씨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식간에 파편이 두 사람을 덮쳤다. 포탄이 떨어진 시간, 소년 현승군은 다른 사람들과 방공호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온몸에 피가 낭자한 영랑선생과 형님 현영씨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공호 계단을 내려왔다. 영랑선생은 복부와 다리에 피가 낭자했고, 현영씨는 왼쪽팔이 거의 벌집이 되어 있었다.

1940년 5월 26일 김현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김영랑(왼쪽 첫번째)이 지인들과 경주 분황사 여행 중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병원을 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을 연 병원도 없었거니와 환자를 싣고 길을 나섰다가는 언제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방공호에서 4일을 보냈다. 응급조치래야 집에 있던 ‘옥도징끼’를 뿌려주는게 고작이였다. 9월말 방공호는 고온다습했다. 파편이 박힌 상처가 썩기 시작했다. 영랑선생은 그곳에서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실신을 반복했다.

4일 동안 반공호 안이 온통 신음소리 뿐이였다. 물론 잠을 자지도 못했다. 주변 어른들이 영랑이 방공호에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어떻게 해서든 병원으로 데려가자고들 했다. 현승씨가 밖에 나가서 어떻게 해서든 마대포대를 구해 왔다.

8월 27일 밤 12시쯤 됐을 것이다.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을 당가에 싣고 거리로 나갔다. 주요도로는 모두 통제되고 있을 때다. 현승씨도 영랑선생을 태운 당가의 한쪽을 잡았다. 일행은 경비망을 뚫기 위해 시구문을 택하기로 했다. 시구문은 현재 서울 중구 광희동 2가에 있는 광희문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성문밖으로 시체를 내가던 문이었다. 그만큼 후미진데 있었고 경비도 허술한 곳이였다.

일행은 시구문을 빠져나가 두어시간을 헤맨 끝에 어렵게 ‘내과의원’ 간판을 발견했다.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시라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곳에서도 시간이 30분간이나 지체됐다. 간절한 외침끝에 어렵게 문이 열렸다. 내과병원에서 파편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사고가 난 후 거의 4일만이었다. 영랑선생의 상처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였다. 복부아래 파편을 제거했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28일 새벽 절명했다. 그의 나이 48세때의 일이자 서울이 수복된 날이었다. 이렇게 강진이 낳은 서정시인 김현구와 김윤식은 6.25의 와중에 2개월 차이로 허망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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