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흥저수지서 4~5단 양수 예사

1994년 가뭄때 김영삼 대통령 헬기타고 장포마을 찾기도

1994년 7월 17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가뭄이 극심한 칠량 장계리 현장에서 양수시설을 살피고 있다. 칠량일대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가장 크게 드는 곳 중의 하나였다.
강진의 상습적인 가뭄 피해지역으로 칠량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지대가 거의 바닷가이고, 큰 저수지가 없어 90년대 초반까지 조금만 가뭄이 들어도 난리가 났다. 칠량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삼흥저수지 정도가 규모 있는 저수지로 꼽힐 정도였다. 삼흥저수지는 1956년에 착공돼 1961년에 완공됐다. 그러나 규모가 작아서 조금만 비가 적게 와도 칠량의 넓은 들에 물을 대는 것은 역부족이였다.

물은 위아래가 있기 마련이었다. 저수지와 가까운 논들은 그나마 저수지 혜택을 봤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또랑의 물은 줄어 들었다. 저수지와 가까운 논을 똘채라하고, 저수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논은 미급이라고 불렀다.

삼흥저수지에서 흘러보낸 물은 삼흥들과 영계를 거쳐 영동까지 흘러갔다. 영계까지는 물이 잘 내려왔으나 영동일대는 항상 물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물이 개천을 타고 내려오면서 이리저리 들어가기 때문이다.
칠량 영계마을 박종안 어르신은 “차례물이라고 했제. 위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논에 물을 대면서 아래쪽으로 물이 오면 그 논에 물을 넣기 때문이제. 물싸움도 많이 했어. 비는 안오고, 위쪽에서 물을 몽땅 써버리면 아래쪽 사람들이 막 화를 냈제”라고 60~80년대 가뭄을 회고했다.

삼흥저수지 바로옆 신흥마을에 사는 이정옥어르신은 평생동안 삼흥저수지가 세 번 마른 것을 봤다고 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는 없다. 저수지 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그곳에 저수지 깊은 곳에 발동기를 10여대씩 설치하고 밤새 물을 품었다. 농민들은 양수기에서 품어나온 물을 서로 대려고 밤새 잠을 자지않고 보초를 섰다.

칠량 일대는 다행히 명주리에서부터 장계천까지 흐르는 하천이 있었다. 삼흥저수지 물이 떨어지면 농민들은 하천을 파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천에 갈대가 수북하지만 당시에는 하얀 모래와 자갈이 많았다. 그곳을 깊이 파내려 가면 물이 고였다. 웅덩이에 물이 고일 정도가 되려면 밤새 삽질을 해야 했다.

물도둑도 많았다. 고생고생해서 하천에 둠벙을 파놓으면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물을 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면 핏대를 올리며 싸움을 했다.  

명주리에서부터 하천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장계리는 가뭄때 마지막으로 물을 퍼올리는 곳이였다. 하천의 끝지점이여서 그랬는지 상류가 바짝 말라도 이곳을 파면 물이 고였다. 1994년 가뭄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장포마을을 찾았다.

당시에는 장계리 하천에서 굴착을 해서 4~5단 양수를 해서 칠량면소재지~구로마을 일대까지 물을 퍼올리던 시기였다. 그만큼 가뭄이 심했다. 칠량 주민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삼흥저수지 규모를 확장해 달라고 건의했다. 삼흥저수지는 3년전 숭상사업이 완료돼 칠량지역 가뭄해결에 큰 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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