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권/시인

- 손암 정약전-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본인에게 지워진 운명을 피하려하지 않고 위기를 성찰의 기회로 삼아 유배현장을 학문의 산실로 반전 시켰던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세기가 되었지만 애민사상의 토대위에 세워놓은 목민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다산이 성리학이라는 두꺼운 벽을 허물고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던 조선 후기 사실 속에서 진리는 찾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지향하던 그였다. 노론과 벽파에 속해있는 숙적들은 그를 향해 성리학을 비판하고 천주학을 신봉한다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세우려고 했었다.

1800년 8월 천주교의 교세 확장을 일시적인 종교현상으로 인식하고 억압을 거부하던 정조가 승하했다. 수렴청정에 들어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 부자는 대역 죄인으로 다스려져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고 둘째 형 손암(巽庵)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다산은 목숨만 부지 한 채 귀양길에 들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하였지만 관아의 경계가 삼엄하여 안정된 거처를 찾지 못하고 유배 초기를 힘들게 보냈다고 한다.

손암은 흑산도에 도착하여 그의 친화력과 섬사람들의 후덕한 인심을 바탕으로 선비로서의 사업에 충실하였고,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맞닿아있는 사리마을 언덕 중턱에 복성재(復性齋)를 세우고 서당을 열어 섬마을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학문의 세계로 안내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흑산도 근해에 있는 물고기나 해양 동식물의 생태와 특징을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학 연구서로 손꼽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저서를 남겼다.

또한 우이도 어상 문순득이 풍랑에 표류되어 오끼나와와 필리핀. 중국 등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극적으로 생환해 돌아온 표류 견문을 듣고 표해록(漂海錄)을 남겼다. 한 사람의 표류 경험을 듣고 자기의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해 놓은 실기(實記)라는 점에서 기록문학적(記錄文學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다산은 흑산(黑山)이란 이름이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주므로 형님에게 편지를 쓸 때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쓰곤 했다고 한다.
다산의 학문은 두 살 터울인 셋째형 정약종 보다는 항상 앞서 갔기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지만 네 살 터울이었던 둘째형 손암의 재능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은 세 번이나 성균관 시험에 낙방했지만 셋째 형 은 성균관 시험에 바로 합격했다고 자랑했었다.
유배 후기에 다산은 초당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저술 활동이 자유로워졌지만 손암은 흑산도에서의 막막함과 그리움을 술로써 잊으려 했고 민중들과 고통을 함께하느라 자신의 학문과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다산은 글을 쓰는 도중에 막힌 것이 있다든지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할 때에는 항상 흑산도에 보내 서문을 받은 다음 마무리했다고 한다.
1805년 2월 숙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죽고 점차적으로 순조의 왕권이 안정되자 아우가 유배에서 곧 풀려날 것이라는 소문이 흑산도에까지 돌았다. 손암은 동생이 해배되면 맨 먼저 자기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강진에서 들어오는 뱃길과 좀 더 가까운 우이도로 거처를 옮겼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한만은 생을 마감했다.

다음은 다산이 존경하던 손암을 여의고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다.
슬프도다! 어지신 분이 이렇게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다니.
원통한 그분의 죽음 앞에 나무와 돌멩이도 눈물을 흘릴 일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이제는 학문연구에서 비록 얻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상의를 해보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가 없다면 죽은 목숨보다 못한 것이다.…”
다산이 18년 유배 생활 중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음은 중앙관직 경력을 바탕으로 자기의 학문·사상을 체계화 시킬 수 있도록 학문적,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준 손암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과 지방정치를 넘나든 풍부한 경험과 귀양살이를 통하여 터득한 애민사상과 형제간 우애가 융합하여 완성해낸 것이 다산실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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