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금이 많다... 개의 목걸이도 금으로 만든다

아랍인들이 상상한 곳은 신라의 수도 금성이 아니라
강진의 옛 이름인 ‘금릉’일수도

함평에서 발견된 ‘서역인의 얼굴이 새겨진 토기’는 이미 6세기에 아랍인들과 호남지역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교류가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물건을 사고 파는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양을 항해하다가 태풍에 밀려 표류하다가 이곳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에 남중국 지역에는 서역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때이다. 기원전 바빌론과 유프라테스강 하구에서 시작돼 동진을 계속해 오던 남해로(南海路)는 인도와 미얀마, 말라카해협을 거쳐 7세기 들어 남중국 지역까지 도착해 서역인들이 많이 이동해 왔다.

7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통일신라시대를 열 때이다. 아랍문헌에는 신라에 대한 기록이 7~1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신라를 찾았던 서역인들이나, 남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신라인들을 통해 신라에 대한 정보가 아랍까지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시 신라의 위치에 대한 아랍인들의 인식이다. 초기 기록에서 아랍인들은 신라의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닷가’ ‘지구의 동쪽 끝’이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란 해양실크로드가 이어져 온 남중국 일대를 말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남중국의 동쪽 바닷가는 한반도이고 남중국에서 해류를 타고 올라올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이다.

이러한 기록도 있다. ‘중국의 바다 다음에는 신라의 도서(島嶼)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의 도서는 전남 서남해안 지역의 많은 섬들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남중국에서 올라오면 가장 먼저 보이는게 서남해안 지역의 섬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랍문헌에는 신라를 금이 많은 나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 놓은 천으로 단장하여 식사때 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알마크디시)’‘신라에서 금은 너무나 흔한 것이여서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태도 금으로 만든다.(알 이드리시)’

이러한 기록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통일신라의 수도 金城(경주) 사람들의 사치스러움을 나타낸다고 해석하지만 한편으로 강진입장에서 보면 이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강진의 옛 이름은 금릉(金陵)이었다.

강진일대가 언제부터 금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다. 남중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아랍인들이 신라를 표현하는 ‘金’을 가진 지명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릉은 금성보다 훨씬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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