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 국민회의 후보 전원 당선 ‘싱거운 한판’ 
농고 선·후배 세 번째 대결, 김영진 3승 김식 3패 기록  

김영진 의원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1996년 4월 11일 치러졌다. 지역구 253명과 전국구 46명 등 모두 299명을 선출한 15대 총선에는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통합민주당(민주당) 등이 참여했다.

선거결과, 신한국당이 139명(지역구 121, 전국구 18)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이 됐다. 그러나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국민회의는 79명(지역구 66, 전국구 13)을, 자민련은 50명(지역구 41, 전국구 9)을, 민주당은 15명(지역구 9, 전국구 6)을 각각 당선시켰다.

무소속 당선자는 16명. 신한국당은 야당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 총선 직후부터 무소속과 일부 민주당 당선자를 영입해 국회 개원 때에는 151명이 됐다. 투표율은 역대 총선 중 가장 낮은 63.9%를 기록했고, 당선자중 45.8%인 137명이 초선이었다. 

15대 국회 임기 때인 97년 12월에는 1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98년 2월에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이에 앞서 97년 11월에는 김영삼정부의 경제실정으로 외환위기가 발생,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나라가 부도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광주․전남은 14대 총선 때보다 선거구가 2개 줄어든 23개(광주 6개, 전남 17개)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15대 총선 결과도 14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전원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됐다.
 
두 지역은 ‘국민회의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돼, 오히려 본선(총선)보다도 예선(공천)이 더 치열했다.

15대 총선에 출마한 후보는 모두 6명이나 됐다. 이들은 김식(金湜․63,신한국당) ․ 김영진(金泳鎭․50,국민회의) ․ 윤동환(尹棟煥․45,민주당) ․ 신정철(申正哲․56, 자민련) ․ 김순식(金順植․59,무소속) ․ 정병호(鄭柄浩․58,무소속)후보 등이었다.

선거전은 강진농고 선후배 사이인 김식 후보와 김영진 후보가 만들어 낼 세 번째 대결에서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됐다.
 
아울러 완도출신 정병호 후보가 소지역주의를 자극해 ‘완도 표’를 득표로 연결할 것인가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였다.

김식 후보는 14대 총선 패배 직후부터 15대 총선에 대비해 체계적으로 조직 관리를 해왔다. 95년 4대 지방선거 때 신한국당 내천을 받은 후보들의 선전도 김 후보가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국민회의)은 강진군수와 완도군수는 승리했으나, 강진군의회는 의원 11명중 7명을, 완도군의회는 13명중 8명을 빼앗겨 의장 자리를 민자당(신한국당)에 넘겨준 바 있다.

김식 후보는 ‘허송세월 8년, 이번에는 바꾸자’는 선거구호를 내걸고, 도청 강진 유치, 보성-강진-목포 철도 조기 개설, 강진-완도간 도로 4차선 조기 완공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영진 후보는 13대와 14대 국회에서 활발하게 전개했던 의정활동 성과를 소개하면서 3선 고지를 향해 뛰었다.

김영진 의원이 2010년 7월 3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4대강 사업 중단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동료의원들과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 후보는 특히 선거자료에 ‘정권교체를 원하면 국민회의와 김영진에게 힘을 달라’는 문구를 크게 써 김대중 총재의 대권도전을 바라는 지역 유권자들의 기대심리를 표로 연결하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는 농어가 부채 경감, 강진․완도에 농수산전문대 유치,  완도지역 연륙․연도사업 추진 등 지역발전 공약을 내걸고 지지를 호소했다.

윤동환 후보(옛 이름 창남)는 옥중 출마를 했다. 윤 후보는 자신이 발행하는 지역신문에 자신의 홍보기사를 게재해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후보등록 전인 3월 22일 경찰에 구속됐다.

윤 후보는 “5년째 신문을 발행해 출향인 등에게 무료로 보내왔기 때문에 사전선거운동이 아닌데 구속됐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득표활동을 전개했다.

<강진․완도선거구 제15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김 식

(63)

 

강진군 칠량면

영동리 631-2

정당인

강진농고 졸, 육사11기 졸, 연세대․중앙대 경영대학원 수료, 육군소장 예편, 국회 농수산위원장, 11,12대 의원, 농림수산부장관

신한국당

16,120

(24.58%)

김영진

(50)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61-7

국회의원

강진농고 졸, 전남대행정대학원 수료, 기독청년협의회(EYC)전국회장, 평민당 강진군 대선본부장, 13,14의원, 국민회의 농어민특별위원장

새정치

국민회의

33,765

(51.48%)

윤동환

(45)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7

강진신문발행인

조대부고 졸,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 건국대 대학원 졸, 재경전남학우회장,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회장

통 합

민주당

3,402

(5.19%)

신정철

(56)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 741

제일유통축산대표

서울 동대문상고 졸, 동국대 경영학과 졸, 민추협 청년부국장,대한역도연맹 이사, 12대 총선 출마(전국구)

자유민주연합

752

(1.15%)

김순식

(59)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1250-4

종교인

(불교)

완도수고 3년 중퇴, 승가대 2년 수료, 환경공해일보 이사, 대왕사 주지, 한국불교 임재반야종 총무원장

무소속

693

(1.06%)

정병호

(58)

완도군 소안면

이월리 632

농어촌연구소이사

목포공고 졸,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중퇴,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 수협 연수원 교수부장, 경실련 중앙위원

무소속

10,847

(16.54%)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신정철 후보는 고향인 완도 약산면에서 80년대 중반 전국 최대 규모의 한우목장을 경영하다 정부의 축산정책 부재로 막대한 손실을 봤던 경험을 예로 들며, 안정적인 축산정책을 만들겠다면서 득표활동을 했다.

김순식 후보는 특이하게도 현직 승려 출신 후보였다. 법명이 청솔인 김 후보는 ‘김순식은 이렇게 하리라’라는 제목의 공보물에서 농민 후계자 병역 면제, 그린벨트 전면 해제 등을 약속했다.

정병호 후보는 수협중앙회에서만 26년을 근무하고 수협 교수부장을 역임한 ‘수산통’이었다. 완도출신 세 후보 중 가장 득표력이 있었던 정 후보는 ‘이제는 바꿉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농어촌부채탕감 특별법 제정, 어민재해보상법 제정 등을 공약했다.

선거 결과, 김영진 후보의 3선 성공으로 끝났다. 김 후보는 유효투표수 6만5천579표 중 51.48%인 3만3천765표를 득표했다. 선전이 예상됐던 김식 후보는 1만6천120표(25.58%)를 얻는데 그쳤다. 1위 김영진 후보와는 무려 1만7천645표 차이.

정병호 후보는 1만847표(16.54%)를 얻어 3위를 차지했고, 첫 총선 출마가 옥중 출마가 된 윤동환 후보는 3천402표(5.19%)를 획득해 4위를 기록했다. 이밖에 신정철 후보는 752표(1.16%)를, 김순식 후보는 693표(1.06%)를 각각 득표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인연
두 대통령 도움 많이 받아

김영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국민회의)과 권오을 신한국당 간사가 1999년 10월 국회를 방문해 농가부채 해결을 주장한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과 강기갑 부의장 등 농민단체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영진 의원(1947.11~ )이 5선 의원과 농림부 장관이란 이력을 쌓으면서 중진 정치인이 되기까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큰 도움이 됐다.

김 의원은 강진농고 2학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봤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맞붙었던 67년 6대 대선 때였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강진읍 입구 소나무밭 광장에서 윤보선 후보 찬조연설을 했다.

검정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우렁차게 연설을 하는 ‘연사 김대중’의 모습은 ‘학생 김영진’의 혼을 빼버렸다.

김 전 대통령은 연설이 끝난 뒤 유세차에서 학생 김영진에게 손을 내밀고 등을 두드려주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를 했다.‘멋진 정치인 김대중’의 격려는, ‘시골 학생 김영진’이 나중에 정치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우연으로 시작된 김 의원과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필연으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 때 교계와 농업계 몫으로 김 의원을 공천했고, 13대 국회 진출은 지금의 김영진 의원이 있게 한 출발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김 의원은 전국기독교청년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80년대 중반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인권운동 관련 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변호사였던 노 전 대통령은 부산권을 대표해서, 김 의원은 광주권을 대표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46년생 개띠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그후 각종 민주투쟁에 동참하면서 말도 놓는 친구사이가 됐다.

광주청문회 때는 두 사람 다 청문회 스타가 됐다. 김 의원은 ‘친구 노무현’ 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 김영진 의원을 당무위원으로 추천해 관철시켰고, 참여정부 때는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김영진 의원은 세 번씩이나 치열하게 맞붙었던 김식 전 의원의 보좌관이 될 뻔 했었다. 1981년 11대 총선 직후였다. 농협에서 해직돼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을 할 때였다.

김식 의원은 육사 동기인 윤기석 목사를 통해 지역담당 보좌관을 제의했으나, 김 의원은 “5․18 가해세력과 손잡는 것은 반역적 선택”이라면서 거절했다.  

15대 국회 이후 강진을 떠난 김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선거구에서 당선돼, 국회 상임위도 농림수산위에서 교육과학기술위로 옮겨서 활동했다.
 
18대 국회 기간에도 5․18 민주화운동이 유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데 기여했고, 정부가 추진하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를 광주로 유치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부인 윤순남 여사와 1남(의정) 2녀(주희, 희정)를 두고 있다. 아들은 아시아나항공 조종사로 근무하고 있고, 맏사위는 시드니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인 조인철 용인대 교수. 둘째 사위는 치과병원의사로 있다.   

(김영진 의원이 강진에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던 13대, 14대 국회 때의 의정활동과 정치행적 등은 이미 소개했음. 강진일보 홈페이지 참조.)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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