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광주박물관에 있는 '서역인의 얼굴이 새겨진 토기'는 깨진 도기의 아랫부분에 음각돼 있다. 크기가 작아서 앞쪽에 대형 돋보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6세기 해양실크로드 타고 중국 명주까지 왔던 아랍인들

계절풍 항로 따라 전남 서남부지역 자주 왕래했을 것

강진은 그중에서 의미심장한 곳중의 하나

서역인들의 흔적은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유물에서 다양하게 발견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서역인 모양을 한 얼굴 유물은 전라도나 충청도에서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대구 저두리에 6세기에 아랍인들이 내왕했다는 말도 그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학자들은 서역인들이 해양실크로드의 끝지점이었던 중국의 절강성 양주(지금의 상해일대)에서 신라의 울산항을 왕래하며 교역을 하지 않았느냐는 추정을 해왔다. 울산항은 통일신라시대 국제무역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여러가지 허점이 많았다. 중국 절강성 쪽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면 가장 가까운 곳은 강진과 같은 서남해안 지역이다. 이 지역을 건너뛰고 먼바다를 돌아 울산만 왕래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울산항도 이용했겠지만, 서남해안지역에도 서역인들이 도착했어야 맞다. 당시 항해에는 그게 맞은 이야기다.

이와관련해서 함평 창성유적에서 발견된 서역인 얼굴이 새겨진 토기는 여러 가지를 암시해 주는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서남해지역에서도 아랍인들이 왕래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다.

옛날에 중국 절강성 일대에서 우리나라로 오는 뱃길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책에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고대 선박의 항로는 조류나 풍향에 의해 결정됐다. 배가 기계의 힘으로 움직인지는 불과 200여년이 못됐다. 그 이전의 수단은 모두 돛을 달고 움직이는 풍력이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1123년(인종 1) 5월 28일 절강성 명주에서 배를 타고 고려 수도 개경을 향해 출발했다. 서긍은 5일 뒤인 6월 2일에 중국의 동쪽경계인 협계산을 지나고 3일에는 흑산도에 도착했다. 명주에서 흑산도까지 8일이 걸린 셈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나라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이틀후에 예성강입구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이 항로가 대표적인 계절풍에 의한 항로다. 필리핀 해역에서 생성된 큐류시오 난류는 일본 남해를 거슬러 북상하고 일부의 지류가 제주도 남쪽에서 갈라져 대마도를 지나 동해로 북상한다. 또 일부가 제주서쪽을 타고 우리나라 서해를 거슬러 올라 오는데 절강성쪽에서 배를 띄우면 이 해류를 타고 북상해 흑산도를 거쳐 예성강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항해 기간이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 항로는 바로 실뱀장어가 올라오는 길이기도 하다.

이 뱃길이야 말로 당시 중국 서남해안 지역과 한반도를 가장 빠르게 연결해 주는 항로였다. 그것도 배에 돛을 달아 계절풍에 맡겨 놓으면 거의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뱃길이였다.

6세기 들어 남중국 일대에는 해상실크로드를 타고 이동해 온 아랍인들이 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지역이 절강성 명주일대다. 이곳에 있던 아랍사람들이 이 뱃길을 이용하지 않았을리 없다.

계절풍을 타고 흑산도까지 항해한 아랍인들은 뱃머리를 돌려 신안이나 목포, 해남, 영암, 함평, 강진등지에 들렀을 것이다. 강진은 그중에서 의미심장한 곳 중의 하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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