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운/언론인

노씨와 박씨는 광주교육대학 동기생이다. 노 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회갑 무렵에 명예 퇴직했다. 명문 대학을 나왔음에도 교감 직에 못 오른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퇴직을 서둘렀다. 이와 달리 초등에서 중등계로 전직한 박씨는 서울로 근무지를 옮긴 후 고등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지난해 정년퇴직 했다. 같은 대학을 나오고도 초등과 중등, 평교사와 교장직이라는 평가 차이를 느끼게 하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그들은 대학 때 공부를 잘했다. 졸업성적이 상위 5%에 들만큼 우수했었다. 그 당시 교사 자리가 달려 1차 발령이 극소수에 달했다. 그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졸업과 동시에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할 수 있었다. 첫발령지가 완도군 면단위 섬인 금당도와 약산도였다. 공부잘했던 인연 때문에 대학 때 결성한 칠송회라는 친목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어른을 모시고 공동체 생활을 한 것도 공통점이다. 노씨는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독자이기 때문에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졌다. 박씨의 사정은 다르다. 친어머니가 아닌 장모님과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박씨 장모님은 20대에 남편과 사별한 후 세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 집안으로 장가들었던 게 한집 살림을 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함께 살아야했다. 정신이상자였기 때문이다. 막내 처제는 시집간 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결혼 후 박씨 부부는 장모님과 정신질환자인 처제와 한집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퇴직을한 노씨와 박씨는 매일 요양원으로 향한다. 노씨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해 있어서 그렇다. 박씨의 배경은 사뭇 다르다. 정신이상자인 처제가 뇌종양까지 발발해 요양시설에 입원해야만했다. 한집에서 생활하던 처제의 병세가 중증이어서 일반의 보호가 어려웠다. 그런 딸이 안쓰러워 장모는 매일 그 요양원을 찾아 안부를 점검하고 눈물바람을 한다. 박씨는  장모님을 그랜저 차에 태워 아픈 처제가 입원해 있는 요양원을 출퇴근하듯 오가고 있는 것이다. 기묘한 인연을 공유한 운명체들이다. 퇴직 후 요양원을 가야만하는 두 사람의 느낌은 같을 리 없다.

노씨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어머니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20대에 홀로된 어머니가 노씨만을 바라보며 재가하지 않고 살아온 과거가 온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연민의 정이 전신을 휘감고 돌때면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제 92세가 되어버린 늙은 어머니가 이 세상을 버틸 날이 얼마나될까. 한집에서 같이 생활하지 못한 현실이 죄의식을 키운다.

박씨는 이따금씩 짜증이 난다. 옛동료나 친구들과의 약속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어김없이 오전 10시면 수도권 요양원으로 차를 몰아야 한다. 장모님과 처제의 만남이 끝난 뒤 집에 돌아오면 오후 2시가 된다. 이 때문에 낮 스케줄은 잡을 수 없다. 요양원을 오가는 한 외부 약속은 저녁때만 가능하다. 가까운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장모 모시는 팔자인데 요양원 출퇴근 좀하면 어떠냐” 운명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원망과 체념이 숨어있는 자포자기성 독백이다.

노씨의 어머니처럼 20대에 홀로된 박씨의 장모님은 박씨 같은 사위 없다는 말을 자주한다. 사위를 놓아주지 못한 자신의 속 좁은 생각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깔려있을 것 같다. 생활력이 강한 여자이지만 정신질환자인 딸을 데리고 홀로 살아간다는 게 크나큰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통과 고독. 과부의 한을 한 몸에 지닌 채 강인한 인내와 기력을 유지하기란 쉽지않다. 젊은나이에 홀로된 한 여자의 한과 결혼 후 정신질환자가 있는 처가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운명이 만나 서로가 열정적 에너지를 만들어내지못했다.  세월이 가져다준 무기력이 두드러진 장모님이지만 날마다 요양원에 가자고한다. 사위는 내색 없이 “어서 가시지요”라는 말로 기꺼움으로 위장해서 마음편하게해준다. 

노씨와 박씨는 지난달 서울에서 만났다. 박씨의 딸 결혼식장에서다. 식전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셨다. 어느새 요양원 이야기가 나왔다. 노씨는 요양원을 들려 어머니를 마주치면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박씨는 오전 9시만 되면 장모님은 요양원에게 가자며 서둘러댄다고 했다. 두사람은 설날도 요양원에 간다는 말을 남겼다. 노씨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기에 설날이라해서 부담스럽지 않다. 그와 달리 박씨는 설날이 아닌 평일에 장형을 뵙고 세배를 올릴는게 마음에 걸린다. 부인 앞에서 짜증 섞인 대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부러워했다는 한국의 가족제도는 흔적을 찾기 어렵게 돼버렸다. 자신을 낳아 가르쳐준 부모를 종국에는 요양원으로 옮겨 영결의 시간을 기다리는 정떨어진 세상으로 밀려나 버렸다. 부모·자식·손자가 한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고 살아온 정겨운 가족제도는 옛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꼬리만 가물거린다. 명절 때면 성묘하는 것처럼 정초의 요양원 방문은 부모 봉양의 한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설날 요양원 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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