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리 석성(石城) 흔적마저 사라진다

말을 기르는 성이였을까

대구 관찰봉아래에 숨어 있는 돌성의 모습이다.
지난 20일, 대구면 남호마을 뒤편의 넓은 야산. 주민들이 바다로 가는 길을 이곳저곳에 만들어 놓았다. 그중 주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 야산의 중간쯤에 있다. 이 길을 따라 바다쪽으로 걸어 가다보면 도로주변에 유난히 돌 무더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돌 무더기는 길이 끝나는 바다까지 계속 이어져 있다.

이것들이 바로 옛날 말을 기르던 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흔적이다. 돌무더기들은 성의 담장이였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무너져 내렸고, 마을주민들은 그 성터를 기초로 해서 바다로 나가는 콘크리트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성터는 70년대 초까지만해도 사람 키 만큼이나 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건축용 자재로 많이 사용돼 버렸고, 양식장 돌로 많이 실려가면서 그 규모가 크게 줄어 들었다.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진 성돌은 건축자재로 쓰기에 안성 맞춤이였다.  남호마을의 한 주민은 “옛날에는 꽤 높은 돌담이 있었다. 바닷가라 돌이 귀하기 때문에 필요한 돌은 돌담것을 가져다 사용했다”고 말했다.

성의 규모는 대단한 것이였다. 성은 이곳 남호마을에서 바닷가에서 시작해 인근 구곡마을 앞산을 거쳐 봉대산을 지나 장흥 대덕으로 이어지는 장장 30리가 넘는 돌성이었다. 봉대산 아래 계곡에는 지금도 높은 성터가 조금 남아 있다. 나머지 구간에도 성이 있었다는 흔적이 아주 조금씩 남아 있다. 장흥쪽 구간은 대덕읍 끝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간척을 해서 땅이 더 이어지지만 예전에 바다가 있었던 끝지점이다.

성의 범위는 마량과 회진지역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국이다. 이 어마어마한 성을 쌓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 성이였다는 뜻이다. 돌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아주 띄엄띄엄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를 막기 위한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성의 기능을 말을 길렀던 곳으로 추정하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말들은 마량에 도착할 즈음이면 초주검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양으로 수송되기 전 일정기간 육지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다. 마량에서 말을 가두고 풀을 먹일 공간이 필요했는데 30리가 넘는 울타리를 치고 말들이 마음껏 풀을 뜯게 했던 곳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덕으로 넘어가는 곳의 돌성이다.
이 돌성은 거의 보존되지 않고 있다. 장흥쪽에서 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강진쪽이나 장흥쪽이나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대덕면의 한 주민은 “이쪽 성터는 주변에 밭이 많아서 둑으로 사용되는 곳만 돌들이 남이 있고 모두 평지가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수수께끼도 많다. 마량지역에 말을 풀고 가두려면 성의 남쪽 부분이 깎아지듯 해야하는데 곳에 따라 계단을 만들어 마량쪽에서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했다. 말을 가두놓고 기르기 위해 만든 석성이였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름도 많다. 마유성이란 설도 있고, 계치성이란 말도 있다.

이 성을 복원하자고 하면 너무 허망한 소원이 될까. 그러나 없는 관광자원도 만들어 내는 마당에 있는 자원을 좀 더 적극적으로 복원하면 틀림없이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또 남호마을과 구곡마을 구간이라도 복원을 해서 이곳을 돌성이 있는 문화마을로 개발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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