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밀려든 육지사람들, 섬사람들도 당황했다

‘육인’·‘섬놈’오랜 갈등 단어
대화와 만남으로 풀어가

오랜만에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65년 전남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한 이후 50여년 동안 저 한라산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고생하며 뿌리를 내렸는지 생생히 목격했을 것이다.
육지에서 밀물처럼 들어오는 외지사람들을 보는 제주사람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외부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주도에 달랑 몸만가지고 들어간 전남사람들이 그만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발전연구원이 지난 7월 발행한 ‘제주 이주민의 지역 정체성 정립에 관한 기초 연구’란 책자에 따르면 전남 사람들이 겪은 어려움이 잘 조사돼 있다.  조사에 참여한 전남사람들은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아무런 연고가 없어서 법적인 피해를 볼 때가 많았고 이럴 때 마음이 가장 아팠다고 한다.

한 조사자는 “이주민들 중에는 말씨 때문에 금방 어느지역 출신인지 드러남으로 사업을 할 때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많다. 인허가 과정에서 제주토박이면 금방해결될 일이 전남사람들일 때는 어렵게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제주도 사람들도 이에대해 할말이 없는게 아니다. 제주도의 한 주민은 “제주도는 몽골침입과 4.3 사건 등을 겪으며 외지인들에 대한 많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다른 지역의 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지 않은 호남인들이 제주에서 볼썽사나운 짓을 한 것도 사실이다. 도박이나 술로 세월을 지새우며 제주사람들과 심각한 대립을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기를 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초창기 제주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갖게 했다”고 설명했다. 제주지역에 유지돼 왔던 사회공동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여러 가지 수긍도 된다. 제주도는 전형적인 공동체 사회로 공동체 의식이 강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웃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며칠씩 일을 하면서 서로 도와주었다.

향회, 연자매, 용수의 공동사용과 관리, 수놀음, 향약, 계, 해병공동관리, 마을공동목욕장제 등은 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였다. 특히 제주도는 지표가 화산석이어서 비가 내리면 지하로 물이 빠져 용암층을 흐르다가 해안에 이르러 용출하기 때문에 마을마다 이를 관리하는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제주에는 네것 내것이 없이 먹고 살았다거나, 제주에는 도둑이 없었다거나 하는 말이 모두 끈끈한 공동체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름대로 역사적으로 외부인들로부터 고통도 겪고, 또 나름대로 독특한 공통체를 형성하고 있는 섬에 외지인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들에게 어쨌든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제주 향우들의 큰 버팀목으로 통하는 강진출신의 문인식 향우 부부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도민들과 육지에서 들어간 주민들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는게 공통된 설명이다. 대부분 3D 업종에서 종사하던 호남사람들은 생활전선에서 이런저런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한 호남향우회원은 폭행을 당해 파출소에 가도 호남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런 의견도 있다. 70년대에는 제주도의 경찰 계통에 호남사람들이 요직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호남사람들이 잘못을 해서 제주사람들이 신고를 해도 그냥 빠져나오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토박이들의 외지인에 대한 반발이 더욱 커지기도 했다. 

제주도의 한 토박이 주민은 이런 경험담을 털어놨다. 60년대 중반에도 제주에는 도둑이라는게 없었다. 한번은 밖에 다녀왔는데 집 마당에 있던 함지박이 없어졌다. 얼마 후 호남에서 이사온 사람의 집엘 지나쳤는데 그 집에 함지박이 있었다. 파출소에 신고를 했더니 그 사람이 잡혀왔다.

그 사람은 어디에 전화를 하더니 금새 풀려났다. 함지박도 그럭저럭 건네받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이 제주경찰서에 아는 사람이 있어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이 주민은 지금도 당시 경찰서장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며 당시의 낭패감을 털어놨다. 물론 이런 사례는 극히 희귀한 경우지만 당시 제주민들과 호남사람들의 갈등 요인을 추측할 수 있는 사연은 된다. 제주사람들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향우들이 먼저 열심히 하자는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어 제주도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은 문인식 강진향우회 고문은 향우회 회원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회원 중의 한 명이다.

문고문은 육지사람들과 제주도민들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자 이래서는 안된다 싶었다. 그래서 70년대 중반 육지사람들로 구성된 육인회(陸人會)를 처음으로 조직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제주시 조천읍에 처음으로 호남향우회를 출범시켰다. 회원을 계도하기 위해서였다.

육인회와 호남향우회 사람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이 자리에서는 문고문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남들로부터 칭찬은 받지 못하더라도 욕을 먹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문 고문이 지난 1994년 호남향우회 소식지인 ‘월간 향우’에 기고한 글에는 이같은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문고문은 글에서 ‘우리는 여기 제주에 뿌리를 내려 제2의 삶의 터로 다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특히 우리 호남인 여러분께 바른 삶, 의연한 행동으로 우리 2세들에게 귀감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맘 간절합니다. 허물은 서로 감싸주고 잘못은 깨우쳐 주면서 우리가 떠난 후에도 오염되고 지저분한 모습만은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호남인들은 참는 버릇을 생활화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어떤 행사로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다함께 자각합시다’라고 호소했다. 70년대 초반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문고문이 살던 조천읍 신촌마을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은근히 호남출신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문고문은 마을 이장을 따로 만나자고 해서 이래선 안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제주사람들 중에 육지에서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했죠. 들어온 시기가 다를 뿐이지 제주 본토박이들도 조상들이 모두 육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아니냐고 말입니다”당시 이장을 맡고 있던 제주사람은 문고문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65년 제주도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들에게도 갑자기 밀려드는 육지사람들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자료=‘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두 사람은 대낮에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앞으로 그런 선입관은 절대 갖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이렇게 제주본토박이 사람들 중에서는 육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문고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혹시 살인사건에 정말로 호남사람이 관련돼 있으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틈만 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제발 육지사람들이 관련되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몇 달 후 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다. 다행스럽게도 육지사람은 전혀 관여가 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문고문은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 내린다고 했다. 정치적인 오해를 받을 때도 많았다. 70년대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호남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친 김대중적인 지지성향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대중 후보를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4.3 사건을 겪었던 제주도는 반공사상이 어느 지역보다 강한 곳이었다. 제주의 이같은 분위기 때문에 투표날이 다가와도 김대중 후보의 선거 참관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빨갱이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문인식 고문은 선거 때마다 김대중 후보의 참관인을 자청하고 나섰다. 문고문은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더라. 훗날 민주화가 진행되고 지방자치가 도입되면서 유권자인 향우회원들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문고문은 요즘 사슴을 기르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