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에 대한 주된 관심을 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의의 차원을 넘어서 ‘왜, 그리고 어떠한 배경 하에서 청자의 명산지로 강진이 부각되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문화의 생성과 변화, 발전을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라는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강진의 청자 발달이 강진 지역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배경에 연유한 것이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을 것이나,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만으로 고려청자 문화가 발생하고 발달할 수 있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술한 자연지리적인 조건과 함께 그러한 자연적인 조건들을 이용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이 지역의 사람들에 관해서도 고려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간략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 내용들로는 우선 이 지역의 토기 제작의 기술적인 축적을 들 수 있겠다. 전라도 서남 해안 지역은 청자가 생산되기 훨씬 이전부터 토기 제작 기술이 축적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옹관을 제작하던 배경으로부터 삼국 시대,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토기 제작 기술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새로운 양식과 기술인 청자 제작 기법이 수용되고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차(茶)문화의 보급과 그에 따른 다기(茶器)의 수요, 대중국 교역품으로서의 중국 청자가 지닌 비중 등이 커지면서 자체 생산의 요구가 증가하였을 것으로 가정해 본다면, 강진에서의 청자 발달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사업’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여기에서 강진의 청자 생산의 주체 세력과 청자의 발달과 쇠퇴를 주도한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도 앞으로 문화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중기의 무신집권기에 고려청자는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최씨 정권의 출현과 더불어 전라도 세력의 중앙 정치 무대의 진출이 두드러지는 현상과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해안 지방에 있었다는 점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강진의 청자도 그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 

한편 청자의 전성기에 강진 지역의 또 다른 문화사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무위사와 월남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 세력의 융성과 백련사에 기반을 둔 민중신앙적인 결사운동 등도 모두 최씨 정권과 무관하지 않는 것들이다.

또한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고려청자의 쇠퇴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왜구의 잦은 준동으로 도공들이 왜구의 침략과 약탈을 피해 내륙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강진의 청자가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강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정치 세력과의 결탁, 내지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대량생산이 종래 강진의 고려청자가 지녔던 예술적 수준이나 순수성을 퇴색하게 하였고, 이를 정치·경제적으로 뒷받침하던 무신 정권의 몰락은 강진에서의 청자 문화의 쇠퇴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진의 고려청자 발달을 하나의 지역적 성격을 지닌 문화사적 특징으로 파악한다면 변화의 저변에 어떠한 정치적 요인이 이 지역의 토착 세력과 연관되었는지에 대해 수많은 개연성의 나열과 가능성의 추적 과정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