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 의원 이영권 의원
DJ 총선 4일전 귀국 신당돌풍
6월 항쟁, 6.29선언에도 영향미쳐

‘2․12총선’으로 더 알려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5년 2월 12일 실시됐다. 의원정수와 선거구는 11대 국회와 같았다. 지역구 184명과 전국구  92명 등 모두 276명을 뽑았다. 선거구제는 1구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유지했다.

전국구는 지금처럼 정당득표율에 따른 배분이 아니라,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하되 5석 이상의 의석을 얻은 정당을 자격 요건으로 했다. 법정 임기는 4년. 그러나 여야합의에 의한 9차 개헌(88.2.15) 부칙(3조2항)에 따라 3년1개월18일 만에 임기 종료됐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민정당)이 148석(지역구 87, 전국구 61)을 차지했고, 신한민주당(신민당)이 67석(지역구 50, 전국구 17)을, 민주한국당(민한당)이 35석(지역구 26, 전국구 9)을, 한국국민당(국민당)이 20석(지역구 15, 전국구 5)을 각각 차지했다. 이밖에 무소속이 4석, 신정사회당과 신민주당이 각 1석씩 차지했다.

12대 총선은 민정당이 의석수에서 앞섰지만, 야당이 지역구의원 정수의 52.7%인 97명을 당선시켜 사실상 야당의 승리였다. 더욱이 선거 직후 민한당 소속 의원들이 대거 탈당, 신민당에 합류했다. 신민당은 103석의 의석을 확보해 여당인 민정당과 양대 정당구도를 형성했고, 이후 1987년의 ‘6월 항쟁’과 ‘6․29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때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의원 3명만 남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했다.

창당 20여일 만에 ‘신당돌풍’을 일으켰던 신민당은, ‘동교동계(김대중)’와 ‘상도동계(김영삼)’ 인사들이 주축이 돼 창당됐다. 당시 김대중 선생은 총선 4일전인 2월8일 전두환 정권의 신변위협 경고에도 불구, 미국에서 귀국해 신당돌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 안정론’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 대결
 여당 김식 야당 이영권 당선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에서 금배지에 도전한 후보는 모두 4명.
이들은 김식(金湜․52, 민정당, 강진) ․ 윤재명(尹在明․54, 국민당, 강진), 유재희(柳在熙․50, 민한당, 영암) ․ 이영권(李永權․49, 신민당, 장흥) 후보 등이었다. 완도 출신 후보는 없었다.
 

<전남 제9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 제12대 총선 입후보자명단>

이름

(나이)

기호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김 식

(52)

1

 

강진군 칠량면 영동리 631-2

국회

의원

강진농고 졸, 육사 11기 졸, 연세대․중앙대 경영대학원 수료, 육군소장 예편,국회농수산위원장, 11대 의원

민 주

정의당

95,055

(49.43%)

윤재명

(54)

2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7

정치인

고려대 문과대 졸, 7,8,10대 의원(3선), 한일문화친선협회 회장

한 국

국민당

26,022

(13.53%)

유재희

(50)

3

서울시 종로구 예지동 503-12

국회

의원

조선대 법대 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전국웅변협회 이사장, 민한당 정책심의회 상공위원장, 11대 의원

민 주

한국당

25,785

(13.41%)

이영권

(49)

4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715

 

조교수

조선대 법대 졸,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광운대 조교수, 11대 총선 입후보

신 한

민주당

45,447

(23.63%)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선거전은 소지역 대결과 함께 여당의 ‘정치 안정론’과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 그리고 후보들 간 감정문제까지 섞이면서 치열한 4파전으로 전개됐다. 현역 의원인 김식 후보와 유재희 후보는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3선의 윤재명 후보를 가장 강력한 상대로 판단, 집중 견제했다.

두 후보는 “수작부리는 사람”으로 윤재명 후보를 몰아붙였고, 이에 대해 윤 후보는 “정치에 미숙한 사람들”이라고 두 후보를 반격하는 등 공방을 벌였다. 합동유세 때, 유재희․이영권 후보는 여당후보인 김식 후보를 공격하기보다는 윤재명 후보를 더 공격했다. 유 후보와 이 후보도 선명성 경쟁에서는 서로 난타전을 벌였다. 

4선에 도전하는 윤재명 후보는 김식 후보가 윤씨 성을 가진 경찰관 2명의 인사에 관여했다고 비난했고, 김 후보는 “파면될 뻔한 사람을 살려놨다”고 해명하는 등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함께 후보들은 저마다 완도와의 인연을 동원해 후보가 없는 완도표 공략에도 집중했다.

유재희 후보는 “강진에서만 두 사람을 보낼 수 있느냐”며 출신지인 영암표의 결속을 유도했고, 이영권 후보는 서울과 달리 미미한 신당돌풍에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저인망식 주민접촉으로 표밭갈이를 했다.

선거 결과, 김식 후보와 이영권 후보가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해 국회입성에 성공했다. 김 후보의 낙승은 예상됐지만, 조직력․자금력에서 뒤졌던 이영권 후보의 2위 당선은 다소 의외였다. 

김식 후보는 유효투표수 19만2천309표의 49.43%인 9만5천55표를 얻어 1위, 재선에 성공했다. 두 번째 금배지에 도전한 이영권 후보는 유효투표수의 23.63%인 4만5천447표를 획득, 2위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윤재명 후보는 13.53%인 2만6천22표를 득표해 3위에 머물렀고, 현역의원인 유재희 후보는 13.41%인 2만4천785표를 얻는데 그쳐 4위를 기록했다. 친구사이인 이영권 후보와 유재희 후보는 11대 총선부터 맞붙어 1승1패를 기록했다.

 김식의원, 5년간 농수산위원장 재임 농업통 평가
이영권 의원, 발로뛰는 정치 3선의원 지내 

과천 정부 청사에서 김식 농림수산부장관이 1989년 1월 20일 전국 시․도지사회의를 주재, 농정시책 설명회를 갖고 있다.
김식 의원(1933.2~ )은 군 출신이면서도 농정에 밝은 ‘농정통’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국회 상임위는 농수산위에서만 활동했고, 국회 농수산위원장을 5년간이나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농림수산부 장관(1988~1990)까지 했으니 ‘농정통’이라는 말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육사시절 룸메이트였던 노태우 대통령 덕분에 김 의원이 장관으로 있던 농림수산부의 위상도 행정부 내에서 높았다.

의원시절에는 김이나 미역 등 수산물도 정부에서 ‘수매비축제도’를 확대 실시하거나 계획생산체제 도입을 제안했다. 여당의원임에도 불구, 막대한 양곡을 수입하여 농산물의 가격을 억제하는 물가안정정책 재검토를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농림수산부 장관시절 2백가지가 넘는 농수산물 수입개방을 결정하기도 해 야당과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5년 2월말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고 몇 개월 후, 육사 동기인 전두환 대통령을 면담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강경노선의 신민당이 출범한 만큼 노 대표위원에게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어 갈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라”고 과감하게 직언을 했다.
 
직선적인 성격인 전 대통령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김 의원은 ‘그 사건’이 원인이 돼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됐다. 이로 인해 12대 국회 후반기엔 국회 상임위원장직(농수산위원장)도 내놓고, ‘찬밥신세’가 되기도 했다.

김 의원은 간이 좋지 않았는데, 지난해 중국에서 성공리에 간이식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중이다. 강진을 가끔 방문해 지인들과 옛 동지들을 만나고 있는 김 의원은, 지난주에도 강진을 방문해 며칠간 머물면서 지인들을 만난후 상경했다.  

우산(友山) 이영권 의원(1936.6~ )은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에서 태어났다. 장흥중과 목포공고, 그리고 조선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취업이 보장된 공고에 진학했으나, 국회의원이 되는 빠른 길은 사법시험 합격이라고 판단,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36세까지 고시 공부를 한 이의원은 사시1차는 5번이나 합격했으나 2차는 매번 불합격했다. 행정고시도 1차는 한번 합격했으나 역시 2차는 불합격.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렸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광운대)가 됐다.

이영권 의원이 1995년 가을에 개최된 자신의 후원회 행사장에서 김대중 총재, 김상현 의원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의원은 1981년 3월에 실시된 11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기탁금(무소속 1천5백만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변호사로 있는 친구가 선거운동에 쓰라면서 조건 없이 예금통장을 건네줘 해결했다. 아내에게도 후보등록한 후에 출마사실을 말했다. 돈도 조직도 없었지만 2만5천여표를 득표해 나름대로 선전했다. ‘정치인 이영권’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의원은 민권당 대변인과 동교동계(DJ)와 상도동계(YS)가 참여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데 산파역을 했다. 당시 야당은 전두환 정권의 눈치를 살피던 때였으나, 이의원은 5․18 2주기 성명을 강도 높게 발표해 안기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12대 총선 때 첫 금배지를 단 이후 두 번(13, 14대)을 더해 모두 3선의원이 됐다. 14대 국회 때는 국회 교육위원장도 지냈다. 15대 총선 때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DJ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이영권’의 강진과의 인연은 12대 국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3대 국회부터는 1구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장흥이 단독선거구가 되었다. 그는 14대 국회 임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날부터 한양대 교수로 간 이후 전남도립대 초대 학장과 수원 동남보건대 교수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교직에 재직하다 퇴직했다.

호적보다 실제 나이가 세 살 많은 79세인 이 의원은, 10여년 전에 귀향해 슬로시티로 지정된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서 부인 오금련 여사(강진 군동 출신)와 거주하고 있다. 연말께 출간예정으로 자서전 원고를 쓰고 있다. 자녀는 서울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외아들(우진․46)뿐. 며느리는 강성구 전 MBC사장(전 국회의원)의 큰딸이다. 

(재선의원인 김식 의원의 11대 국회 때 정치행적이나 주요 경력 등은 <11대 국회>편에서 이미 소개했음. 강진일보 홈페이지 참조.)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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