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부터 본격 이주 시작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바다가 저주스러운 요즘이다. 배가 뒤집혀 침몰하면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292명에 달하고, 아직까지 찾지 못한 실종자가 12명에 이른다. 바다는 그렇게 끔직한 장소였다. 세월호 슬픔이 온 나라를 휘감고 있는 요즘은 우연히도 호남사람들이 제주도에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한지 50주년을 맞은 시기였다. 60년대 중반 큰 가뭄을 겪은 호남사람들이 먹고 살 곳을 찾아 작은 철선에 몸을 싣고 제주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다는 그들이 넘어야 할 큰 고난이였다. 제주도에 도착해서는 비참한 삶의 연속이였다. 그들은 어떻게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을까. 호남인들의 제주이주 50주년을 맞아 그들의 삶과 역사를 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1960년대 는 유독 가뭄이 심했다. 한 어린이가 물지게를 지고 물을 퍼날리고 있다
뱃길은 변함이 없다. 땅위의 도로는 굽은 모양이 펴지기도 하고, 좁은 형세가 넓어지기도 한다. 먼지만 날리는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에는 예나 지금이나 바닷물이 있을 뿐이다. 크게 변하지 않은 해류가 있고, 날마다 오가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쳐들어오는 태풍이 있고, 미칠듯이 울어대는 집채만한 파도가 있다. 가슴까지 열어주는 탁 트인 경관도 있다. 수백 년 전에도 그랬고, 수천 년 전에도 그랬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바다 위를 다니는 배의 모양이고, 배의 성능이고,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저 바다 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삶을 개척해 왔다. 바다에 의지해서 목숨을 부지했고, 바다를 건너 꿈을 찾아 떠났다. 바다를 넘나드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로 이주해 들어갔다.  80년대까지 이주한 인구가 10만명이 넘는다.

그럼 우선 왜 지금이 호남인 제주이주 50주년인가에 대해 먼저 설명해 보자. 60·70년대 제주로 이주했던 전남 향우들은 가뭄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이가 아주 많이된 주민들은 64·65년에 큰 가뭄을 겪고 나서 들어왔고, 그보다 나이가 덜 된 사람들은 68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가뭄이 사람들을 섬으로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또 77·78년 가뭄때 고향을 떠나 제주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다.

60·70년대 대규모 이농현상에 대해 여러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있지만 주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징그러운’ 가뭄이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이농을 강요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가뭄은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작심하게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65년부터 78년까지 15년 동안 다섯차례의 큰 한해를 입었다. 1967년 8, 9월 동안에는 호남지역에서, 1968년 6, 7월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예년 강우량의 20~3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는 60년만에 겪는 가뭄이었다. 이때부터 일어난게 대량 이농이다.

68년 가뭄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전남지역은 전국에서도 한해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당시 전남일보에 보도된 상황을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다.

• 1968년 5월 8일-전남등 전국에 가뭄, 못자리 설치도 못하고 도시에서도 급수난
• 5월 15일-담양에서 우물 마르자 부녀자들이 파묘소동
• 6월 25일-영산강상류 고갈로 전남도내 각지 식수난(못자리 1천여정과 기식답 4천여정 고갈)
• 7월 12일-호남지방 가뭄으로 곳곳에서 물싸움. 고흥군에서는 농민들이 면사무소 계장살해.
• 호남비료 조업중단
• 7월 25일-전남일보.‘가뭄으로 벼농사 전멸에 직면’ 보도. 호미모도 완전실패, 300만섬 감소 예상. 광주시내 1만여 남고생들 들샘파기에 동원.
• 7월 25일-정부.여당 전남 한해종합대책 결정. 정일권 총리는 광주에서 관계장관 등과 긴급회의
• 7월 29일-호남가뭄 극심. 대전과 이리에서 열차편으로 광주. 목포에 식수공수.
• 8월 1일-소나기 내리자 물대기하던 장성 황룔 월평리 박경수일가족 5명 낙뢰사망.
• 장흥군 관산면 삼산리에서도 낙뢰로 3명 사망. 전남도내에서 낙뢰로 24명 사상.
• 8월 2일-나주 문평면에서 또 부녀자들 파묘사건 발생.
• 8월 3일-경부고속도로 예산 60억원 깎아 한해보조.

벼 한포기 한포기에 물을 주고 있는 당시 농민들의 모습이 안쓰럽게만 하다.
심각한 한해가 계속되면서 8월초부터는 날품팔이라도 하기위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전남일보 1968년 8월 3일자에는 함평의 상황이 소개돼 있다.

2년째 벼농사를 불태워야 했던 농민들은 비를 기다리다 지쳐 이젠 같이 살아야할 땅을 버리고, 돈을 벌기위해 무작정 고향을 떠나고만 있어 비가 오더라도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

함평군에서는 이미 모를 심은 7천553정보 중 135정보만이 살아있을 뿐 나머지는 완전 고사해 버렸고, 미식답이 1천861정보나 되기에 정곡으로 7만6천6백석을 잃게 됐다.

지난 22일부터 28일 현재 이농자수만도 158명이나 되어 하루 평균 23명이 품팔이 일을 한다고 도회지로 무작정 떠나고 있다.

이중에는 완전 이농자만도 20호이다. 그런데 함평군에서 가장 한해가 심한 엄다면 영여리 김용마을의 경우 작년에도 한해로 42명이 논에서 쌀 한톨도 얻어보지 못하고 논에 불을 질렀는데 금년에도 모 한포기 심어보지 못해 65농가에서 농우 15두와 돼지 72두 기타 사육하고 있는 가축을 몽땅 방매해 식량대책을 강구하려고 있다. 주민 20호는 완전히 이농했으며, 젊은 사람 40명이 집을 나갔다고 김만덕 이장은 말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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