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염소들이 지그 밥인줄 알고”

1970년대 중반 일본에서 어린 묘목을 가져다 심었던 청자박물관옆 녹나무가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엄청난 크기로 자라 당당함을 자랑하고 있다. 당시 나무를 함께 심었던 이용희 선생의 감회가 남다르다.
대덕의 위행량씨 일본에서 가져다 처음 심어

청자박물관 주변 녹나무가 6월로 들어서면서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이곳의 녹나무는 150여그루에 달한다. 구경하기 어려운 녹나무 군락지다. 요즘에는 꽃 향기가 어느정도 떨어지고 나무에서 품어나오는 특유의 향이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청자박물관 주변 녹나무는 지금은 참 아름답고 쓸모 있는 나무가 됐지만 이 나무가 이곳에 심어져 자란 여정을 들어보면 오늘날이 있기까지 참으로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자박물관 녹나무 사연은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1975년경이였다. 산너머 장흥 대덕에 위행량(80년 초반 작고)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과수원을 하고 있던 위씨는 평소에 나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우연한 일로 일본을 가게 됐다.

그곳에서 처음 나무를 보았다. 키가 크고 한사람이 껴안을 수 없는 나무도 많았다. 나무에서는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좋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철 푸른잎을 자랑하니 조경수로 제격이였다.

일본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주모시듯 했다. 천왕의 거처 주변에 온통 녹나무를 심고 있었고, 녹나무로 만든 가구는 최고의 상품으로 대접 받고 있었다. 또 이 나무가 공기 정화기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공장주변을 온통 녹나무를 심은 곳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보니 녹나무가 틀림없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도 잘 자랄 것이라는 반응들이 돌아왔다. 귀국한 위씨는 돈을 몽땅 끌어모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어린 묘목을 수만그루 구입했다. 묘목을 배에 실어 부산항으로 가져왔는데 통관에 문제가 생겼다.

뿌리에 흙이 붙은 어린 묘목은 병균 유입 문제 때문에 통관허가가 안된다는 것이였다. 묘목이 배에 실려 한달 정도 바다위에서 대기상태였다. 그 때 다 죽지 않은 것도 천만다행이였다. 한달을 넘게 바다에서 기다리다 어렵게 허가를 받아 대덕으로 가져왔다.

인부들을 사서 녹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대덕 자신의 땅에 녹나무를 많이 심은 위씨는 홍보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 온게 대구 당전마을에 사는 친척 이용희 선생이였다.

당시 청자박물관 주변은 아직 본격적인 개발이 되지 않은 허허벌판이였지만 중앙박물관 발굴팀이 이용희 선생 집과 주변에서 고려시대 청자기와를 굽던 가마를 발견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였다. 위씨는 이곳에 녹나무를 심어 놓으면 좋은 홍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용희 선생은 위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일대에 묘목 500여 그루를 심었다. 비교적 속성수인 녹나무는 빠른 속도로 자랐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이 염소를 나무 주변에 묶어 놓으면서 상당수 나무들이 염소밥이 되고 말았다. 염소는 녹나무의 잎은 물론 나무 밑둥까지 먹어치워 나무를 고사시켰다.

간신히 집 주변의 나무들이 살아 남았다. 78년 들어서는 강진군에서 나무를 매입해 주었다. 그때 돈으로 13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큰 돈을 들여 녹나무를 일본에서 가지고와 심었던 대덕의 위행량씨는 나무가 대부분 죽어 버렸다. 팔리는 나무도 없었다. 결국 위씨는 홧병에 걸려 80년대 초반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용희 선생은 “이렇게 녹나무 숲이 아름답게 조성된 곳은 제주도를 빼곤 남쪽지방에서 찾기 어려운 것으로 안다”며 “이곳의 녹나무가 잘 자란 만큼 대덕의 위선생도 녹나무로 재미를 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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