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비구승과 대처승 사찰 주도권 놓고 끝없는 갈등

이승만대통령‘왜색승은 절 떠나라’유시 4차례 발표
양측 물러설 수 없는 대립… 한국불교의 큰 전환점 이뤄

1954년 9월 29일 열린 제2차 전국 비구니 비구승 대회 기념사진이다. 2차 대회후 정화운동이 진척이 없자 다시 열린 대회다.<사진= ‘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1일부터 같은해 12월 17일까지 4차례에 걸쳐 ‘불교정화유시’라는 것을 발표한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에 대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핵심은 결혼한 스님들은 사찰을 수도승들에게 돌려주고 절을 떠나라는 것이였다.

전형적인 종교간섭이었지만, 당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에 찌들어 있었고, 자체적으로 이를 정화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200명도 안된 비구승들이 7,000명이 넘는 대처승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을 끌어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인사동 조계사도 태고사라고 해서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지금의 조계종 총무원도 대처승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전국의 사찰과 총무원을 수십년 동안 모두 대처스님들의 영향력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통령이 짧은 기간 동안 유시라는 것을 네차례나 발표했던 것은 그만큼 비구승과 대처승간의 갈등이 컸고, 이를 정부차원에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만큼 금오스님이 주창해 주도한 한국 불교정화운동은 몇십년 동안 뿌리내린 한국불교의 모순을 혁파하는 일이였고, 그 저항 역시 컸던 것이다.

1954년 11월 4일 1차 정화유시에도 불구하고 대처승들이 사찰과 농지를 되돌려 주지 않고 사찰에서 떠나지 않자 2차 정화유시를 발표한다. 2차 정화유시는 1차 정화유시보다 강도가 높았는데 주된 내용은 ‘왜색종교를 버리라’는 것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종교는 그 나라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함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며 더구나 우리나라의 민족종교인 불교는 그 정통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우리 불교의 정통인 선승들이 사찰을 차지해야 한다고 지원했다.

이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찬란한 한국 불교문화를 해친 주범이 바로 일본이며, 해방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의 왜색문화가 남아 있는 것을 대단히 비 상식적인 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정화운동 당시 지금의 태고사의 간판을 떼어내고 조계사 한편을 붙이는 모습이다.
대통령의 2차 유시로 더욱 힘을 얻은 곳은 비구니승, 다시말해 선승들이였다. 2차 유시가 발표되자 금오스님을 비롯한 선승들은 긴급회합을 하고 불교정화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의 결의는 행동으로 바로 이어졌다.

2차 유시가 발표된 다음날 80여명의 비구승들이 일제히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 진입해 총무원의 사무인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대처측이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대처측은 이대통령의 2차유시가 비구측과 정부가 결탁해서 발표한 정치적 음모에 불과하다며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양측의 갈등은 첨예해졌다. 비구승들이 11월 8일 태고사 마당에서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이틀후에는 비구스님들이 태고사에 몰려가 태고사 간판을 떼어내고 조계사 간판과 불교조계종 중앙총무원 간판을 붙였다.

당시 조선일보(1954년 11월 12일자)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큰 절 태고사의 간판이 어느샌가 조계사라고 갈아 붙여졌다. 음주육식을 하고 결혼하고 있는 대처승들은 물러나고 불교본래의 정신을 살리라고 외치며 대회를 열고 있던 비구승들이 이 절의 ‘헤게모니’를 잡았다”고 보도했다.

태고사를 장악한 비구승들은 일간 신문에 광고를 내서 불교정화운동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한편 금오스님이 강사로 나서 매일같이 대 경연회를 열었 다. 불자들에게 역시 불교정화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태고사를 빼앗긴 대처승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리는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대처승 수백여명이 태고사로 몰려와 폭력을 행사했다. 조계사 현판을 부수고 고추가루도 뿌렸다. 이들은 ‘비구승들이 태고사에 침입해서 태고사의 간판을 내리고 사전에도 없는 조계사 간판을 위법적으로 걸었다’고 주장하는 성명서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같은 날 대처측은 수십명의 폭력배를 동원해 비구승들을 공격해 이들에게 구타를 당한 비구 2명이 중태를 입기도 했다.

이처럼 2차 정화유시 후에도 정화불사가 진전되지 않고 폭력사태로 번지자 다시 11월 19일 3차 정화유시가 발표된다. 불교계의 정화를 위해 순조롭게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불교도는 정부방침에 순응하라’는 것이였다.

1~2차 정화유시가 단순히 ‘대처승들은 물러가라’는 경고성에 불과했다면 3차 정화유시는 불교정화운동에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또 한편으로 대처승들은 정부의 방침을 알고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스스로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결코 사찰에서 물러설수 없다는 것을 적극 표방한다. 대처승들은 태고사 대법당에 모여 지성종단회의를 열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대처승들과 함께 정화불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처승들은 뜯어낸 조계사 간판자리에 다시 태고사 간판을 걸었다. 수시로 폭력사건이 일어났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스님들이 경무대를 향해 걸어가던 모습이다.
정부도 이를 계속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입장이였다. 당시 이선근 문교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지속되는 비구와 대처간의 갈등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을 막기 위해 우선적인 해결방법으로 정부가 나서 서울 근교의 사찰을 시작으로 전국의 사찰에 있는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정부가 직접 사찰정화에 나서겠다고 선포한 것이였다.

3차 유시가 나온 후 비구와 대처측은 ‘양측회견’의 자리를 마련한다. 비구측에서는 금오스님을 비롯해 동산스님, 효봉스님등 10명이 참석했고, 대처측은 임석진 총무원장등 10명이 참석했다. 서로 대화를 해서 원만한 합의를 이루자는 회담이였지만 사찰을 뺏고, 빼앗겨야하는 입장에서 대화가 이뤄질 수 없었다.

비구스님들은 “출가의 본질은 부모를 떠나 출가 수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인데 가족도 버릴 수 없고 승적도 버릴수 없다는 것은 승려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주장했다. 대처승들은 “사찰과 승적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저항했다. 쌍방의 회의는 결렬됐다. 나중에도 이같은 쌍방회의는 수십차례 열렸으나 대화가 제대로 성사된 경우는 한차례도 없었다.

쌍방의 회의가 결렬된 지 하룻만인 다음날의 일이였다. 제3차 전국 비구승 비구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온 70여명의 비구승들이 조계사앞에 내리자 대처스님측이 비구승 한분을 불법적으로 조계사 문을 열었다며 감금을 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400여명의 비구 비구니승들이 조계사로 몰려갔으나 항의에만 그쳤다. 결국 제3차 전국 비구니 비구승 대회는 조계사에서 열지도 못하고 무산돼 버렸다. 비구측 스님들은 이제 무언가 큰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부가 비구스님들을 지원하고 당시 언론들도 비구스님들 편이였으나 숫적으로 절대적으로 열세인 비구스님들은 정화불사를 성공시킬 결정적인 힘을 갖지 못했다.

금오스님을 비롯한 동산스님, 청담스님등 400여명의 비구스님들과 신도들이 조계사 광장에서 전격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스피커를 단 자동차를 선두로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조계사 정문을 출발해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 종로 3가, 을지로 3가를 거쳐 광화문과 중앙청을 지나 효자동의 경무대로 향했다.

“삼천만 민족은 들으십시오. 우리나라의 불교정화는 세계정화의 열쇠입니다”
비구승들의 불교정화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하늘로 울려퍼졌다. 행렬이 경무대 앞에 이르렀을 때 비구스님측 대표인 금오스님과 동산스님, 청담스님등 7명의 스님이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다.

이대통령은 “내무부와 문교부에 불교정화에 관해 상세히 지시했다. 만약 정화취지에 불응하는 부당한 점이 있거든 다시 경무대로 와서 마음껏 진정하라”고 했다. 비구스님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이였다. 시위에 참여했던 400여명의 스님들은 대통령의 말에 기쁜 마음으로 사찰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양측의 갈등은 더욱 첨예화돼 대처승들이 전국 비구 비구니 대회에 참석하려는 비구스님들을 납치, 감금, 폭행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온게 제4차 유시였다. 제4차 유시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고 사찰의 문제와 토지, 사찰 주지의 임명권은 투표로써 해결하고 주지임명권은 문교부의 인허가를 받으라’는 것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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