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구명조끼 아쉬움을
다시 갖게하는 고 정상렬 선장의 제언

고 정상렬 선장은 약 30여년 동안 배를 타면서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게 24세때 거문도로 가는 피난선을 몰고 갈 때였고, 그에 앞서 18세때 배를 타자마자 백금포에서 제주로 가는 상선을 탈때였다고 했다. 청산도를 지나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났다.

배가 요동을 치고 배 안으로 바닷물이 철철 넘쳐 들어왔다. 몸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배안의 살림살이가 날아 다녔다. 정선장은 어린 나이였지만 ‘이게 죽는 일인가 보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함께 탔던 다섯명의 어른들도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이 뒤짚혔다는 표현도 했다. 그렇게 서너시간을 헤매고 있을 때 제주쪽에서 경비선이 나와 견인을 해서 구출해 주었다.

또 한번은 30대 후반쯤에 대구 미산포구에서 땔감을 싣고 인천으로 가다가 완도 백일도 앞바다에서 배가 전복됐다. 배에는 5명의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백일도 앞바다는 울돌목에서 내려오는 물이 마치 냇물처럼 빠른 물살이 형성되는 곳이다. 뱃사람들은 다행히 목재를 잡고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주변 배들에 의해 모두 구조됐다. 정선장은 2009년쯤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좌우지간 배가 뒤집히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바다에 빠져 무언가를 잡고 이틀사흘 떠다녀도 정신만 있으면 배를 만나서 살았다. 그러나 정신을 놓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뱃사람들이나 일반 사람들이나 배에서 사고가 나면 무슨일이 있어도 정신을 놓지 말아야 산다’

세월호에서 아깝게 희생당한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만 뛰어들었어도 어떻게 해서든 구조됐을 것이라는 뼈에 사무치는 아쉬움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세월호 객실에서 꼼짝없이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정신을 놓을 틈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故 정상렬 선장은

 ● 1927년 대구 미산마을에서 태어났다.
 ● 14살때부터 고깃배를 탔다.
 ● 18세부터 목리 유재희씨 선단에 들어가 제주를 들락날락했다.
 ● 20세때부터 차종채씨 선단에 들어가 백금포에서 상선을 탔다.
   인천, 부산등 항해하지 않은 곳이 없다.
 ● 23세때 거문도행 피난선 몰다 기사회생했다.
 ● 24세때 6.25가 끝나기 전에 입대했다.
 ● 26세때 제대 후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배를 탔다.
 ● 45세때까지 이배 저배 선장을 하다가 은퇴한 후
   고향 미산마을에서 소일했다.
 ● 2012년 86세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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