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완도~추자도 여객선 인터뷰

큰 사진은 이준석 선장이 최근 구속되고 있는 모습. 우측 작은 사진은 2006년 본사 주희춘 기자와 인터뷰 할때의 모습이다.
“나는 서남해안 항로 잘 아는 사람”
“곳곳 위험, 잠시도 긴장의 끈 놓지 못해”  
서남해 연안항로 해박한 지식 자랑
세월호 항해 당시  3등 항해사에 조타실 맡겨
배 침몰되자 승객 300여명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

대참사로 기록될 세월호 침몰사건의 중심에는 이준석(69. 부산시 동래구) 선장이 있다. 그는 배와 300여명의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했다.

그는 업무상 과실치사와 선박 매몰, 유기치사, 특가법상 도주선박 혐의가 적용돼 구속됐다. 세계 언론은 ‘이준석 선장이 선장의 명예를 더럽혔다(뉴욕타임스)’라고 했고,  ‘왜 그가 그렇게 배를 버렸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일(로이터통신)’이라고 의아해 했다. 그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역사의 죄인으로 영원히 남을 선장이 됐다.

우연히도 필자는 2006년 이준석 선장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2006년 11월 6일이였다. 필자는 강진~제주간 고대 뱃길을 취재하기 위해 완도에서 배를 타고 추자도로 가는 길이였다. 당시 배의 이름은 온바다호였다. 배는 600톤급이였고 승객 236명과 승용차 50대를 실을 수 있는 배였다.

이번에 사고가 난 세월호와 비교할 때 10분의 1 수준이였지만 완도와 제주도를 오가는 가장 큰 여객선이었다.

온바다호는 아침 8시 완도를 출발, 11시에 추자도에 도착해 승객들을 내려주고, 오후 1시 30분에 제주도에 도착한데 이어 다시 오후 4시가 되면 제주항을 출발해 추자도를 거쳐 완도로 오는 왕복코스를 운항하고 있었다.

배가 완도해역을 빠져나갈 무렵, 한 승무원에게 선장 인터뷰를 요청했다. 돛단배를 달고 항해하던 시대와 지금의 항해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 보고 싶었다. 잠시후에 ‘선장님의 아침식사가 끝나는대로 갑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전갈이 왔다. 30여분 후 갑판에서 선장을 만났다.

이준석 선장이였다. 당시 나이는 62세 였다. 첫 이미지는 그냥 평범한 60대 초반의 아저씨 분위기였다.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와 30여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서남해안 항로와 해류, 조류등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섬이 많고 조류가 빠른 우리나라 서남해안 연안항로의 특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였다. 이준석 선장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32세때부터 외양선을 타기 시작했고, 1996년부터 인천~ 부산, 인천~제주를 운항하는 상선의 선장을 맡았다고 했다.

인천~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선장도 맡아봤다. 지금 계산해 보면, 그는 32세부터 외항선을 타기 시작했고, 52세때부터 상선의 선장을 맡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선의 선장이 되기까지 20여년 동안 항해사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선장은 완도~추자도~제주 뱃길은 긴급 상황이 되면 30분 내에 안전한 곳으로 피항할 수 있는 거리에 섬들을 두고 있어 태풍주의보만 없으면 600t급 여객선이 안심하고 다녀도 되는 항로라고 설명했다. 또 추자도 주변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돌풍현상이 자주 나타나 순식간에 기압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바람이 초속 15∼20m로 불고 파도가 심하게 치기 때문에 한시라도 조심성을 잃지 않으면 안된다고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했다.

동서로 이어지는 보길도와 추자도 사이의 항로는 부산~목포, 부산~인천 등을 잇는 최단거리 지점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안도와 보길도를 지나 이번에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진도 앞 병풍도를 거쳐 흑산도로 빠져나가는 구간은 하루 수백 척의 상선들이 통과하는 곳이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준석 선장이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두 번째로 빠르다는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孟骨水道)를 지나면서 이곳을 처음 운항하는 3등 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기고 자신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오랜 항해 경험과 해박한 항로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일까. 그는 300여명의 승객과 배를 버리고 유유히 구조선에 올라타는 대 죄인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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