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읍면의회 운영

계파간 갈등 치열, 강진읍의회‘난형금속편’사용
초대 칠량면의회, 면장 불신임 의결
의회 해산돼 재선거 치르기도

초대, 2대 군동면 의원들과 칠량면 의원들의 모습이다. 1957년 2월에 발행된 강진명감 명승고적이란 책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1952년 4월 25일 개원한 강진읍 초대 의회는 선거구가 4개였다. 이곳에서 15명의 의원이 선출됐다. 당시 여당인 자유당이 5석을 차지했고 한청이 3석, 국민회 2명, 무소속이 5명이 당선됐다. 당시에도 무수속 바람이 있었는지 무소속 규모가 여당인 자유당과 똑같은 것을 볼수 있다. 이 때문에 각 계파간의 갈등이 심각해서 의안을 처리할 때마다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난형금속편(卵形金屬片)에 관한 것이 있다. 계파가 4개파가 옹립하면서 의원간의 마찰이 심각했다. 자유당 의원들은 여당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 반대파 의원들을 내사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난형금속편, 그러니까 계란형태의 금속편을 이용해 표결을 하는 것이였는데 조례까지 만들어서 도입했다.

난형금속편은 달걀크기의 모형으로 2~3㎜ 정도의 두께로 구리쇠를 사용해서 제작했다. 전면에는 ‘난형금속편’이라는 글자를 세겼고, 뒷면에는 ‘강진읍의회’라는 글씨를 새겼다.

의안을 표결할 때 의원들에게 난형금속편을 나누어 주어서 기표소내에서 가, 부의 투표함에 투입해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했다. 난형금속편이 어떻게 해서 의원들간의 갈등을 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기표할 때 부정이나 애매한 기표를 방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니였는가 추정해 본다.

난형금속편은 3대 강진읍의회가 해산될 때까지 계속사용됐다. 다른 지역에서는 난형금속편 사용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것은 강진읍에서 유일하게 사용했던 특이한 의사표시 방법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강진군정 50년사’에 기록돼 있는데 강진읍 3.5.6대 의장을 했던 윤형순씨의 증언이라고 부연돼 있다.

읍면의회의 또다른 재미있는 기록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칠량면의회에 관한 것이다. 칠량면은 유일하게 의회가 해산된 사례를 보인다.

칠량면 초대의회는 주민 직선으로 각 마을마다 한명씩 12개 리단위에서 12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초대의장에는 영동리 출신의 윤옥현씨가 선출됐다. 칠량면 의회는 출범 초기부터 집행부와 의회가 마찰을 빚었다. 당시에 면장은 의원중에서 선출하는 구조였다.

의회에서 김기만씨를 초대면장으로 선출했으나 마찰이 깊어지면서 결국 1952년 7월 면의회는 면장을 불신임 의결했다. 면장 불신임안을 의결해 재선거가 치러진 곳은 전국에서 승주군 쌍암면에 이에 칠량면이 두 번째였다.

이에 김기만 면장도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면장에게는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있었다. 김기만 면장은 의회의 불신임 의결에 불복해서 지방자치법 제121조 제3항의 규정에 따라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의회를 해산시킴으로서 의회와 집행부가 첨예한 갈등을 빚은 전국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는 오명을 안았다.

1950년대 면의회가 운영되던 광경이다.
이에따라 재선거가 실시되어 2회 의회가 구성되고 김기만 면장도 당연히 사직하게 됐다. 주민들도 의회파와 면장파로 이분화 돼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2대의회는 초대 의장이었던 윤옥현을 면장으로 선출함으로서 불신임 파문은 일단락 됐다고 한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읍면의회중에 병영면의회의 운영사례가 상당히 모범적이다. 병영면 의회는 3대째를 이어오면서 1961년 5월 16일 해산되기까지 73회의 회의를 개최했다. 기록에 따르면 여러차례의 면예산 추경안을 심의 의결하기도 했고, 성남~발천간 도로개설의 건을 의결한 기록도 전해오는등 주민생활과 밀착된 안건을 많이 다뤘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대로 읍면에서 풀뿌리 구실을 해오던 읍면의회는 9년 동안 이어져 오다가 5.16 군사혁명 직후 해산된다. 그후로 약 30여년간 지방자치제가 중단되는 과정으로 접어들었다.(참고자료: 강진군정 50년사, 강진군지)<계속>  /정리=주희춘 기자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