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맥 아래 무늬없는 印을 지금 전하노라

만공선사, 경허-만공-보월-금오 잇는 선맥 인증
고향 강진 떠나 출가한지 13년만의 광명

금오선사의 모습이다. 좌측하단에 신묘년 3월 3일은 1951년을 의미하므로 금오선사가 55세때의 모습이다.
1924년 음력 12월 금오스님의 나이는 28세였다. 스승인 보월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으로 건당식(建幢式)을 치르지 못한 금오스님은 걸망을 걸머쥐고 참선 삼매경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오대산 상원사로 길을 떠난다. 건당식이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해 주는 일종의 기념식으로 선승에게 최고의 영예스런 자리였다. 스승이 열반에 들면서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금오스님은 오대산에서 동안거에 들었다. 동안거란 선종(禪宗)의 승려들이 10월 16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 90일 동안 외출하지 않고 사찰에 머물며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한 객승이 찾아와 금오스님을 찾은 것이였다. 그는 만공선사가 보낸 사람이였다. “만공선사께서 동안거가 끝난 후 덕숭산 정혜사에서 뵙기를 희망하십니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당시 만공선사는 금오스님도 전설적으로 생각하는 최고의 선승이며 고승이였다. 그런 큰스님이 금오스님을 친견하겠다고 친히 사람까지 보낸 것은 놀라운 일이였다.

여기서 만공선사(1871 ~ 1946)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만공선사는 경허스님의 선맥을 이은 사람으로 우리나라 선맥의 우뚝한 거봉이였다. 이른바 '덕숭문중'(德崇門中)이 그의 법맥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비구스님으로 보월,용음,고봉,서경,혜암,전강,춘성스님등이 있고 비구니스님으로는 법희, 만성, 일엽스님 등이 있다.

금오스님은 동안거가 끝나고 서둘러 충남 덕숭산 정혜사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오는 만공선사가 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알수 없었다. 당시 만공스님은 스승이였던 보월선사의 직계 스승으로 자신의 할아버지 뻘 되는, 그저 먼 발치서 이름이나 듣고 있는 큰 어른이였던 것이다.

당시 만공선사는 제자 사랑이 각별했다고 한다. 그토록 아꼈던 제자 보월의 갑작스러운 열반소식에 3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묵했다고 한다. 보월스님은 만공스님의 간화선법을 계승 실천한 제자였고, 그 간화선을 이어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금오스님이였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불교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는 간경 수행, 주문을 외우는 주력 수행, 좌선을 통하여 깨침을 추구하는 참선 수행, 기타 염불 수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좌선을 으뜸으로 삼아 일종의 공안, 곧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소위 간화선(看話禪)이다. 간화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 또는 '화두를 보게끔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화두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경허- 만공- 보월- 금오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선맥은 이 간화선을 뿌리로 해서 이어지는 참선 수행법이다.

금오스님에게 선맥을 전한 만공대선사의 모습이다.
만공선사가 보월의 제자인 금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였을지 모를 일이다.

금오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밤낮을 걸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아래 정혜사에 도착해 곧바로 만공선사가 거처한 조실방으로 친견을 하러 갔다. 만공선사는 보월의 문하에 있었던 태선을 보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금오가 당대 최고의 선지식을 만난 순간이였다.

만공선사는 금오에게 보월의 법을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그때가 바로 보월선사가 입적한 이듬해인 1925년 2월 15일이였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금오가 보월선사의 사법임을 증명하는 건당식을 봉행했다. 당시 만공선사가 금오에게 내린 게송은 불교계 선승들이 아직도 주옥같이 생각하며 가슴에 새기는 문구라고 한다.

‘덕숭산맥 아래 무늬없는 印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금오(金烏)는 하늘끝까지 늘으네.

이때부터 금오라는 본명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오스님은 강진에서 태어나면서 얻은 속명인 태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태선으로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였다. 만공선사가 태선에게 ‘무늬 없는 印을 전하노라’한 뜻은 ‘보월이 비록 지금 세상에는 없지만 보월의 법을 대신 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40살 되던 해 경북 김천 직지사 조실 취임
‘오직 용맹정진’ 불교 살리기 결사운동 펼쳐


천하 제일의 선지식 만공대선사가 친히 내린 이 전법계는 보월의 존재를 확실히 하는 동시에 금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보월선사가 사법제자인 태선에게 전법식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입적한 것을 그의 직계스승인 만공선사가 수제자 보월선사를 대신해서 건당식을 하고 금오스님에게 문손(門孫)임을 증명하기 위해 내린 이 전법계는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였다. 금오선사에게 경허- 만공- 보월로 이어지는 문손의 입실(入室)을 허락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대단한 광명이 아닐 수 없었다. 16세 나이로 강진을 떠나 금강산 마하연선원으로 출가한 뒤 13년만의 일이였다.

금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태선은 만공선사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인연을 잊고 오직 법열의 선정에 빠져 들었다. 산에서 움막을 치고 매섭게 용맹정진했고 때로는 거리에서 눕고 잠들고 하며 만행을 닦았다. 걸식을 했고 걸행도 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 였기 때문에 사찰들은 이미 일본 왜색불교로 인해 대처승들이 주지를 맡고 있었다. 일제는 비구수좌들에게 거쳐를 주지 말라고 사찰에 명령을 내렸다. 참선하는 스님들이 발 디딜 곳이 없던 시절이였다. 금오스님은 걸식을 하며 때로는 승려신분을 감추고 거지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1935년, 그가 40살이 된 때였다. 금오선사는 만행을 멈추고 수좌들의 요청을 받아 김천 직지사의 조실스님을 맡게 된다. 금오스님이 출가한지 23년만에 법석에 앉아 후진을 양성하는 자리에 안게 된 것이다.

조실은 사찰에서 최고 어른을 이르는 말이다. 절의 규모가 커서 종합수도원인 총림(叢林)을 갖추고 있을 경우에는 방장(方丈)이라 부르고, 총림 아래 단계의 절에서는 조실이라 부른다. 우리 나라에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경우 영축총림(靈鷲叢林)이 있는 통도사,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있는 해인사,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송광사,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는 수덕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이 있는 백양사를 제외한 모든 절에서 가장 큰 스님을 조실스님이라고 부른다.

금오선사가 직지사에서 대중들의 교육에 앞장서면서 가장 강조한게 용맹정진이였다. 용맹정진이란 스님들이 주위의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면서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부처님의 말씀에 충실하자는 것이였다. 이 신념은 그가 열반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당시 왜색불교가 넘쳐나면서 한국의 선방과 수좌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승려들에게 반강제적으로 대처를 강요했다.

금오스님은 쓰러져가는 한국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용맹정진하는 수좌정신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오스님은 수좌들이 꾸벅꾸벅 조는 것을 굉장히 싫어 했다고 한다. 만중 수행중에 조는 수좌가 있으면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내려치곤 했다.

하루는 선방에서 수행중이던 한 수좌가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았다. 사정없이 죽비가 내려쳐졌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 선방에 왔느냐”
“큰스님, 견성성불을 이루기 위해 왔습니다”

금오선사가 제자들을 양성할때의 모습인데, 금오스님은 여러 사찰에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해 오늘날 금오문중이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때 스님의 유명한 질책이 나왔다.
“수행이란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요, 장사꾼이 장사를 열심히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출가 수행자가 공부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참선수행중에 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금오선사는 몇 번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수좌가 있으면 다른 절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금오선사가 이처럼 용맹정신에 집착했던 것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선불교를 지키기 위한 선결사(禪結社)운동이였다. 고려말 중앙 소수의 귀족과 왕족들이 독점한 불교를 지방과 대중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불교계 제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한 백련결사가 있었듯이 금오선사는 일제에 의해 망가지고 해체되어가는 조선의 선불교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결사를 행했던 것이다.

금오선사는 직지사에서 1940년 초까지 수좌들의 선결사공부를 돕다가 직지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수행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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