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상인이 장사하듯, 농민이 농사짓듯 최선 다해야”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에서 만공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이은 금오대선사. <사진=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
16세 출가 후 오직 참선수행 외길
28세 이른 나이에 깨달음 인가받아
경허→만공→보월→금오 법맥 이어

불교계에서는 지금도 금오스님이 16세의 어린나이로 성불을 하겠다며 강진 병영땅에서 무려 3개월 동안 금강산 마하연선원까지 걸어서 찾아간 것을 신비롭게 생각한다. 불가에서는 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을 떨쳐 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행하는 것을 두타행이라고 한다. 그 사람을 우리가 종종 들을 수 있는 고행자라고 한다.

태선은 강진에서 금강산까지 3개월 걸어가면서 두타행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 교통편이 없던 시절에 무려 3개월 동안 비와 바람과 추위, 굶주림을 겪으며 태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타행을 실천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교통편도 불편했지만 수행환경도 최악의 상황이였다. 각 사찰에서는 일제가 사찰령을 시행할 때라 결혼하지 않은 행자를 맞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일제가 비구 수좌들에게 거쳐를 내주지 말 것을 각 사찰에 강요했던 것이다. 더욱이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불교는 침체될 때로 침체되어 있을 때라 각 사찰들은 식량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실정이였다.

금오스님이 16세때 출가를 결심하고 금강산까지 걸어간 후에도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불도에 입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태선은 3개월의 장도 끝에 결국 금강산 마하연에 도착했다. 마하연선원은 근대 선불교의 중흥을 이루는 선원이였다. 한국불교 간화선의 중흥조인 경허선사, 만공선사등 많은 선승들이 전진했던 곳이 바로 마하연선원이였다.

이곳에서 태선은 좀 독특한 방법으로 불도에 입문한다. 보통 남성출가자가 불도에 입문하면 행자→사미→비구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행자생활부터 하는게 기본 절차다. 그러나 태선은 행자보다 한 단계 위인 사미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그곳에서 참선하고 있던 경허선사의 제자이며 혜월스님의 법자인 도암긍현 스님이 강진에서 금강산까지 걸어 온 3개월을 두타행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수행자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태선은 마하연선원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았다.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등 스스로 울력을 하며 선적(禪的) 수행을 실천했다. 마침내 수행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후 태선은 1915년 1월 5일 도암긍현 선사를 은사및 계사로 모시고 득도(得度)를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비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로써 태선은 경허→만공→ 혜월로 이어지는 경허문중의 문손(門孫)이 된다. 도암긍현 선사는 보월선사의 법제자였다.

태선은 도암긍현 선사가 내린 ‘이 뭣꼬’란 화두를 밤낮으로 정진을 계속하다가 선의 참모습을 깨친다. 禪이라는 것은 문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자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의 나이 19세때의 일이였다. 마하연선원에 도착해 불도에 입문한지 3년만에 그가 보았던 선의 세계였다.

태선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3년을 보낸 후 20세때 안변 석왕사 내원암으로 수행장소를 옮겼다. 함경남도에 있던 안변 석왕사 역시 경허선사를 비롯해 만공선사등이 선풍을 일으켰던 곳. 태선은 이곳에서 3년 동안 용맹정진의 결사에 들어간다.

일반인들도 흔히 사용하는 용맹정진이란 용어는 원래 불교용어이다. 수행자들이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앞을 보면서 참선에 임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결사란 말도 비장함을 내포한 단어다.

금오스님의 열반 44주기를 맞은 지난 2012년 10월 2일 금오문도회소속 스님들이 속리산 법주사 금오스님의 부도탑을 참배하고 있다. <사진= 불교신문 제공>
태선이 어린 나이에 보인 구도를 향한 비장함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그의 모든 관심과 행동, 목표는 참선이였다. 그는 참선만이 성불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불교수행의 목적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불에 있고, 성불하려면 견성해야 하고, 견성은 화두타파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그가 화두를 잡고 참선에 몰입하는 이유였다.

다음 말은 태선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참선수행에 충실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글이다.
‘수행이란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요, 장사꾼이 장사를 열심히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출가 수행자가 공부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참선수행 중에 조는 것은 크게 잘 못된 것이다’<금오대선사 행장. 372페이지 참조>

금오스님은 이렇게 참선을 농사꾼이 농사짓는 것이나 장사꾼이 장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일반인들도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로 본 것이다. 수행자들이야 말로 농사꾼과 장사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금오스님의 설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태선은 안변 성왕사에서 6년 동안의 긴 수행을 마치고 다시 오대산 월정사로 발길을 옮겼다. 1921년, 그러니까 그가 26세때였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벌써 10여년 동안 수행을 해 온 선승이였다. 당대 선지식인들을 찾아가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배우는게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였다. 태선은 월정사 상원암에서 당대 최고의 선승인 한암선사를 만나 수행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만행은 계속됐다. 만행이란 스님들이 여러 곳으로 두루 돌아 다니면서 수행을 하는 것을 뜻한다. 태선은 이어 근대 선을 중흥시킨 경허선사를 비롯해 용성스님등이 운집했던 양산 통도사로 발길을 옮겼다.
태선은 통도사에서 마음 한가운데 모실 수 있는 스승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도사는 당시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운영되는 대표적인 사찰이였는데 이곳에서 조선불교의 한탄스러움을 보았던 것이다. 마음 한가운데 모실 스승을 찾아 오직 참선에만 몰두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찾아 간 곳이 천성산 미타암선원이였다. 천성산은 통도사와 같은 양산에 있었다. 태선은 미타암선원에서 무려 14년 동안 오로지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 했다. 이때 태선의 용맹정진을 보고 감동하지 않은 선지식인이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태선은 16세때 출가해 당대 최고의 선승들로부터 참선을 배우면서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 수도자의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이처럼 태선이 수행한 장소를 차례로 열거 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선승들을 평가할 때 그들의 수행행적이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선승들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참선의 과정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금오스님이 불교에 입문한 후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의 초창기 행적을 살피는게 가장 합리적인 일이다. 

미타암선원에서 용맹정진을 마친 태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충남 예산에 있는 보덕사로 향한다. 당시 보덕사에는 만공선사의 제자인 보월선사가 법회를 열어 전국에서 선지식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보월선사는 만공선사의 수제자로 부처님의 법을 대중에게 설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태선은 보덕사를 찾아가면서도 경북 양산군 청선산 미타암에서 충남 예산까지 걸망을 지고 걷고 또 걸어갔다. 흡사 어린 시절 강진에서 금강산 마하연을 찾아 걸어서 두타행을 실천하던 모습이였다. 1923년 3월의 일로 그의 나이 28세때다.

보월선사를 친견한 태선은 이내 의기가가 상통해 여장을 풀기도 전에 그동안 참선을 통해 얻었던 자신만의 깨달음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태선은 보월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올린다. 불교계에서 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를 게송이라 한다.

‘시방세계를 투철(透徹:사리에 밝고 정확하다)하고 나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다’

그 게송을 들은 보월선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 한다. 이후 태선의 게송을 점검한 보월선사는 분명히 깨달음이 있음을 간파하고 곧 태선에게 인가(印可)라는 것을 내렸다.   인가란 스승이 제자의 깨친 마음을 증명하고 인정하여 법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보월선사가 태선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에게 자신이 역시 깨달은 법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수도자에게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1923년 3월의 일로 그의 나이 28세때의 일이였다. 그러니까 태선은 출가 12년만에 깨달음을 인정받은 당당한 선승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태선은 보월선사의 사법(嗣法: 법을 계승함)제자가 됨으로서 경허와 만공, 보월의 뒤를 이어 한국불교의 선맥을 잇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됐다.

태선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보월선사를 매우 존경했다. 보월선사를 통해 비로소 출가 수행자로서의 가치를 크게 깨달았다. 보월선사는 늘 나에게 정진을 강조했다. 정진하지 않는다면 깨달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태선은 보월선사의 수제자로서 2년 동안 그의 밑에서 용맹정진하며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그런데 1924년 음력 12월 12일이였다. 큰 스승으로 모셨던 보월선사가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이다. 태선은 스승으로 받들었던 보월선사의 다비식을 거행하고 먼산을 바라보며 슬픔에 찬 눈물을 흘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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