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장군은 남쪽 고향 강진을 그리워 했던 것일까

정전협상장에서 남쪽 기자에 각별한 애정 표시

“남일장군의 당당함에 현기증 느낄 정도”
  2년 1개월에 걸친 정전회담 기싸움 압도

1951년 7월 8일부터 2년 1개월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정전협상은 수많은 기록사진이 있지만 컬라사진은 몇장되지 않는다. 남일장군(제일앞쪽)이 붉은 줄이 그어진 복장에 긴장화를 싣고 정전협상 회담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미국의 유명한 잡지 피플지에 게재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사진=피플지>
1951년 7월 8일부터 2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유엔군 종군기자들과 남한측 기자들을 통해 상세하게 보도됐다. 기자들의 관심은 단연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 대표들이 벌인 신경전에 모아졌다. 양측이 벌이는 신경전이야 말로 3.8선을 한 뼘이라도 더 유리하게 그으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북측의 신경전을 총 지휘한 사람은 물론 정전회담 대표였던 남일장군이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눈을 통해 기록된 몇가지 사례를 보면 남쪽 기자들이 그를 왜 ‘남일이가 타고난 미남이지만 만약 배우의 직업을 택했다면 그는 명연기의 주인공이면서 성범죄자인 탕아의 길을 걸었을 것이지만...<동아일보 1951년 7월 25일자 참조>’이라고 힐난한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1951년 7월 8일 시작된 한국전쟁 휴전회담 첫날 남면·북면 싸움<강진일보 1월 21일자 9면 참조>에서 패한 공산군 측은 이틀 뒤인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본 회담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꾀한다. 유엔군 측은 각자 작은 손거울을 호주머니에 놓고 회담장에 들어왔다. 안전보장을 장담할 수 없는 개성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손거울로 유엔군 전투기에 신호를 보낼 참이었다.

공산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첫 회담날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더러운 지프를 유엔군 대표에게 할당한 것이었다. 어떤 지프에는 유리창에 총알자국과 핏자국이 남아있기도 했다.

유엔군측 대표단이 탄 지프에는 커다란 백기가 걸려 있었다. 원래 백기게양은 예비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이었다. 유엔군측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백기 걸린 유엔군 행렬은 마치 ‘항복사절’ 같았다. 공산군측은 이것을 백분 활용했다. 깔끔한 제복을 입은 북한군 장병을 태운 트럭 3대가 유엔군 대표단 행렬을 개성으로 인도했다.

트럭은 개성 시내를 천천히 돌았다. 트럭 위에서 ‘만세’의 몸짓을 하는 북한군과, 백기를 게양한 채 그 뒤를 따르는 유엔군 지프의 행렬…. 여기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공산군측 카메라맨의 모습….
공산군측은 포로들을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시내를 퍼레이드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유엔군 측이 ‘뭔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때는 늦었다.

굴욕 끝에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측 대표들은 예비회담 때처럼 북쪽의 테이블에 앉아 ‘남면’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측은 두 번 다시 속지 않았다. 아주 정중한 태도로 유엔군 대표단을 남쪽 테이블, 즉 북면(北面)의 자리로 안내했다. 어쩔 수 없이 유엔군측이 북면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공산측의 2연승이었다.
이어 3번째 심리전이 이어졌다. 정식회담은 서로 기립한 채 신임장을 교환한 뒤 자리에 앉음으로써 개막되는 것이었다.

유엔군 대표단장인 C. 터너 조이(C. Turner Joy) 중장은 여기서 작전을 쓴다. 터너는 공산측에게 유엔측의 신임장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 중장이 공산측 신임장을 내밀자 터너는 머뭇거렸다. 남일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터너 중장을 바라보았다. 터너 중장은 공산측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기다려 신임장을 받았다. 남일은 터너가 머뭇거리다 신임장을 받자 무심코 자리에 앉았다. 터너의 이상한 행동에 시선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은 것이다.

정전회담이 열린 첫날 유엔군 대표들이 북한측이 제공한 짚차를 타고 회담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앞쪽에는 백기가 걸려 있고, 이짚들은 북한이 유엔군으로부터 노획한 것들이였다. <사진=위키백과사전>
그 때였다. 신임장을 받느라 자리에 서있던 터너 중장이 잽싸게 개회사를 읽어 내려갔다. 유엔군측은 ‘승자가 먼저 발언한다’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 발언순서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꼼수를 부린 것이다. 터너 중장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한방 먹였다’고 여겼다. 유엔군 1승2패.

터너가 ‘승자의 미소’를 흘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공산측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유엔군측을 쏘아보는 남일 대장의 얼굴이 아주 높아보였다. 남일 뿐이 아니었다. 작은 키의 공산측 대표들이 유엔군 측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특히 남일 중장은 등을 한껏 곧추 세운 뒤 조이 중장을 내려다 보았다. 공산측이 유엔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 정도)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 대표단이 ‘무슨 짓이냐. 의자를 빨리 바꾸라’고 항의했다. 공산측은 ‘알았다’며 ‘쿨’하게 의자를 바꿨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공산측 사진기자가 ‘남면(南面)의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를 깔보는’ 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공산측이 3승1패를 얻은 순간이였다.

오후 회담에서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 대표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엔군측이 오전 회담 때 테이블 위에 작은 탁상용 유엔기를 놓아두었는데, 공산측이 어느새 탁상용 북한기를 놓아둔 것이다. 문제는 북한군 기가 유엔기보다 2~3인티나 더 큰 깃발이었다는 것이다. 받침대와 깃대, 그리고 기의 끝장식이 조금씩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산측의 4승1패가 되는 순간이었다.<경향신문 2012년 8월 23일자 ‘이기환의 역사의 흔적’ 참조>

당시 정전협상장에서 남일장군을 가장 가까이서 봤던 사람은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였다. 그는 남한 기자중에 유일하게 회담장 내부 출입이 허용된 사람이였다. 당시 유엔군 회담장 내부를 취재한 기자들은 유엔군 기자를 포함 20명이였는데 이중 딱 한명이 동아일보 최흥조 기자였던 것이다. 최흥조 기자는 남일장군을 ‘타고난 미남이지만 만약 배우 직업을 택했다면 그는 명연기의 주인공이면서...’라고 평가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흥조 기자는 1951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3회에 걸쳐 ‘외곽에서 본 그 이면 개성정전회담’이란 시리즈 기사를 연재했는데 그의 큰 관심중의 하나는 남일장군에 관한 것이였다. 그의 연재기사에는 남일장군에 대한 평가와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십명 기자 가운데 필자가 유일한 한국인인 것을 인식한 남일도 정이 있는 시선으로 필자를 주시하였고 카메라를 들고 그를 촬영하려 노력하는 필자를 위해 반사적으로 발걸음을 멈추는 듯 하다. 백선엽 장군이 조이 제독을 선두로 하는 유엔군대표단의 후미를 걸어가는 것과는 반대로 남일을 북측대표단의 선두에서 중공군 장성 등화와 사방을 거느리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회담장을 오가고 있다. 위풍당당한 남일의 어깨바람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남일이 한번은 회담장을 나와 정원으로 향할 때 밖에서 유엔군 종군기자와 북한쪽 기자, 남한기자등 30명이 사진기를 대기시켜놓고 사진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일과 중공군 대표 등화가 마루위에 정열했다. 카메라가 기계음을 연발하자 남일은 미국기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조선말로 “그만하지”라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필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남일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시치미를 떼며 카메라를 향해 몸을 다시 바로 잡았다’<동아일보 1951년 7월 25일자 참조>

전쟁기술자 남일장군과 남한쪽 기자 사이에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기사 내용이다. 냉혈한으로 이름을 떨친 남일장군이 남한 기자에게 그토록 반사적인 애정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단순히 남쪽 사람들에게 자신을 잘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면 남일장군에게 어울리지 않은 분석이 된다. 적국 인민들에게 잘보이려고 행세한 인물이였다면 그는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가 고향 사람에게 보인 무의식적인 호의가 아니였을까 하는게 기자란 직업을 가진 필자의 분석이다. 그가 남한사람이고, 남한의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이 고향이라는 것이 그가 남한 기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애정표시를 한 징표로 보인다는 것이다.

1953년 8월 10일,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개성 내봉장. 재개된 제20차 회담에서는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유엔군측 수석대표 터너 C 조이 중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했다. 훗날 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기네스북에 올려야할 일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끝났다. 앞으로는 협의하지 않겠다”
조이 중장은 휴전회담의 핵심내용이 되는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양측 접촉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측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한 달 전(7월10일) 정전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군사분계선 설정 등 핵심의제를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여왔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의 상태인 38도선을, 유엔군측은 현재의 양측 접촉선(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조이는 이날 “더는 공산군측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면서 “앞으로는 현 접촉선에 대해서만 협의할 것”이라며 최후통첩 한 것이다. 이날 조이 중장은 선수를 쳤다고 자못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공산군측 대표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산군측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입술을 꽉 깨물고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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