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력을 말하는 두 눈, 짙은 눈썹… 그는 미남이다”

‘탄력있는 근육, 훤칠한 키, 오똑한 콧날’ 
남한 언론들도 극찬한 남일장군의 외모
전형적 서구스타일… 병영 남씨와 꼭 닮은꼴

1951년 겨울 어느날 남일장군(제일 앞쪽 긴 코트입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정전협장 회담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롱코트와 햐얀장화, 담배파이프등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진=위키백과사전>
남일장군이 남한지역 주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1년 7월 10일 6.26 전쟁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그 전 남일장군이 고향 병영에 다녀갔단 말이 있기는 하다.

병영에서 몇몇 주민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일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밤 고향집에 찾아와 잠시 머물다 곧바로 돌아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게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소문으로만 있는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그러나 6.25 전쟁당시 남일장군이 본격적으로 남한사회에 알려지기 전에도 이미 알음알음으로 북한군 대장인 남일장군이 병영사람이라는 것은 병영주민들 사이에 기정사실화 됐던것 만은 분명한 일이다.

남일장군은 북한군 장성 1명과 중공군 대표 2명을 이끌고 그쪽 수석대표 신분으로 개성의 회담장에 나타났다.

정전회담이 시작되기 까지 유엔군과 북한군간에 비밀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사정은 우리쪽 정보기관에서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겠지만 남일장군의 모습이 일반대중 앞에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회담장에는 유엔군 종군기자 60여명과 한국기자 10여명, 북한기자 30여명이 쉴새없이 카메라 셔터를 터트렸다.

그러나 당시 보도를 보면 남한이 가지고 있던 남일장군에 대한 정보는 몹시 빈약한 것이였다. 우선 모든 공적인 문서와 각종 기사에 南日장군의 이름이 모두 南一로 표기되고 있다. 이는 우리측에서 남일장군에 대해 정확한 한문글씨 조차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951년 7월 초 본격적인 정전협정이 시작되기전 군소식통이 밝힌 남일장군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이때 군 소식통은 南日을 南逸로 표기했다.

‘한국출생. 유년시절에 소련으로 들어간 후 타쉬켄터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소련군 대위로 복무후 1949년 귀국해 북한괴뢰군교육성 부상을 했다. 수개월 후 소위인민군유격대총사령부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한국동란 발발후 북한괴뢰야전군사령관으로 현지에 이르렀다. 그의 연령을 알수 없으나 40세로 추측된다. 남일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에 소련대표의 일원으로 소련대위자격으로 출석한 일도 있다’<동아일보 51년 7월 10일자 참조>

전체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남일장군의 약력과 일치하지만 여기에서는 나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게 눈에 띤다. 당시 남일장군의 정확한 나이는 만 38세였다. 또 남일장군이 소련에서 북한으로 귀국한 해는 1949년이 아니라 1946년이었다. 33세의 나이였으며 소련군 소령 신분이였다. 남일장군은 1945년 소련군에서 소령으로 승진해 사단참모장이 됐다.

정전회담장으로 들어서는 북측대표들의 모습이다. 뒷쪽의 중공군 대표들은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북한군 대표들은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사진=위키백과사전>
그런 그가 귀국 6년만에 우리나라의 교육부장관 격인 교육성 부상을 거쳐 40세도 안된 젊은 나이에 북한군 대장이 됐던 것이다. 이같은 남일장군의 개괄적인 약력은 우리쪽 정보기관을 상당히 혼란스럽게 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도대체 남일이 누구이길래...”하는 호기심이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당시 유엔군 정전협정 대표였던 윌리엄헤리스(William K. Harrison) 중장은 56세였다. 유엔군측은 이 새파란 북한 대표를 어떻게 해서든 좌지우지 하려고 이런저런 전략을 짰다.

회담 첫날 남일은 잔뜩 멋을 부리고 나타났다. 당시 기록사진을 보면 유엔군 대표인 미군들은 상당히 편해 보이는 군복을 입고 있고, 중공군 대표들 역시 서민풍의 조금은 초라한 군복을 입고 있는게 눈에 띤다.

그러나 북한군 대표들은 잘 정돈된 모자와 깔끔한 군복,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남일장군의 복장은 단연 유엔군쪽 기자와 남한쪽 기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호화로운 흰 가죽장화를 신고 나팔총 담배대를 들고 회담장에 걸어 들어왔다. 바지에는 두꺼운 노란색 줄이 두 개 수놓아있었다. 큰 키의 그가 자주입고 나타난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코트는 권위를 내세우려는듯 보였다.

당시 남일장군을 평가한 우리쪽 신문기사를 살펴보자.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할 내용들이다.

‘묵직한 괴뢰대장의 견장을 두 어깨에 맨 적수석대표 괴뢰총참모장 남일은 어쨌든 미남이다. 탄력있는 근육, 적당하게 탄 얼굴, 통찰력을 말하는 두 눈, 강한 의지력을 상징하는 일자로 다물어진 입이 인상적이다. 재치 있는 두볼, 균형잡힌 얼굴, 호색적인 미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얼굴에는 1946년 당시 서울에서 폭동을 선동하던 조선공산당 박헌영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살기가 등등하다’

당시 언론도 남일장군의 외모에는 상당한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미남이였다. 오똑하고 긴 콧날, 진한 눈썹, 눈아래에서 턱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광대뼈, 무엇보다 180센티미터가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등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런데 이런 서구형에 가까운 미남형 모습은 요즘 대한민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얼굴이다. 전형적인 조선인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장에 모습드러내
38세의 인민군대장, 56세 유엔군대표와 대결

남일장군의 부친인 남주익 전 병영면장. 오똑한 콧날과 강한눈매, 긴 얼굴등을 아들이 그대로 빼닮았다.
다시 병영면으로 돌아가 보자. 병영면사무소 2층에 가면 역대 면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남일장군의 부친으로 추정되는 남주익 면장(1945년 9월~ 1946년 7월 역임)의 사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이미 기술한바 있지만 남주익 면장의 얼굴 역시 전형적인 서양풍이다. 오똑한 콧날에 두꺼운 광대뼈가 매우 인상적이다. 수염은 서양사람들이 즐겨 기르는 카이젤 수염을 하고 있다. 

병영에 터를 잡았던 의령남씨 후손들이 네덜란드인 핸드릭 하멜일행의 후손일 수 있다는 가설을 일정부분 수용하면 남주익 면장과 그의 아들 남일장군의 서양풍 외모는 어느정도 해답이 나오는 부분이다.

1951년 남한 사람들을 그렇게 매료시켰던 남일장군의 외모는 이렇듯 병영이란 열쇠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는 역사의 수수께끼인 것이다.

남일장군의 외모를 칭찬했던 언론은 그의 전쟁경력에 대해서는 혹평을 퍼붓는다.
‘남일처럼 살기등등한 얼굴의 주인공은 흔히 사랑의 범죄 결실인 사생아 가운데 많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출생의 비극을 저주하면서 범죄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남일이가 만약 배우의 직업을 택했다면 그는 명연기의 주인공이면서 성범죄자인 탕아의 길을 걸었을 것이지만 시베리아 눈보라속에서 성장하여 살인의 업을 쌓았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인해전술을 구사하며 꽃같은 이 나라 청년남녀를 대량 살육하고 또 약탈과 방화, 살인으로 백의인민들에게 수난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동아일보 1951년 7월 25일자 참조>

당시 우리쪽 신문이 적군의 사령관을 평가하는데 이 정도의 표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였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유엔군측은 1951년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돼 1953년 7월 27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2년여 동안 남일장군의 타고난 전략과 전술에 휘말려 여러차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정전회담에서 남일장군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많다. 유엔군과 북한군간에 치열한 심리전을 펼친 내용들이다. 1951년 7월 8일 양측은 처음으로 본회담을 위한 예비회담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1년 여에 걸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양측의 처지가 절실한 상태였다. 남일장군은 현장에 없었던 회담이였다. 양측이 예비 회담에서부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심리전은 불꽃 튀겼다.

예비회담 장소는 개성 북쪽의 광문동에 자리잡은 민가였다. 그런데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측의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회담장에 들어선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은 공산군측보다 먼저 남쪽을 향하고 자리에 앉았다.

공산군측은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다. 왜 유엔군 측은 남쪽을 향해 앉으려 했을까. 동양에서 남쪽을 향해 앉는다는 것, 즉 ‘남면(南面)’은 천자가 제후를 거느리고 않을 때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풍습을 대체 유엔군 연락장교들도 북측과의 심리전에 대비해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유엔군 측에 허를 찔린 공산군측도 가만 있지 않았다.

보드카와 맥주, 과일 캔디 등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측 연락장교단이 이를 거절했다. 동양에서 음식을 권하는 것은 승자가 패자를 위해 베푸는 자비이자 위로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황제나 임금이 베푸는 ‘하사품’의 의미가 짙다. 그래서 유엔군측이 손사래를 친 것이다. 첫날의 예비회담에서는 유엔군 측의 심리전이 승리를 거둔 셈이 됐다.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한국전쟁 휴전회담 참조>
 
유엔측이 남일대표를 상대로 1승을 거둔셈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유엔측의 패가 계속된다. 남일의 지략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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