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에 그만큼 큰 전투를 해 본 사람이 없었다

1,200만명 사망한 독소전쟁에서 큰 전공
1946년 8월 재소전문가그룹으로 평양입성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소련군대가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가운데 하얀말을 탄 사람이 남일장군의 직속 상관이였던 소련의 전쟁영웅 주코프 원수다. <사진=위키백과사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다. 1942년 11월, 29세때 육군대위 계급을 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여한 남일장군은 이후 1943년 3월 하르코프 공방전, 43년 7월 독소 양측 6,300여대의 기갑전력이 맞붙은 역사상 최대의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투, 44년 6월 동부 폴란드 벨라루스에 남아 있는 독일군 중앙집단군 섬멸작전인 바그라티온 전쟁에 참가해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는 45년 1월 영관급으로 진급하면서 게우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1벨로루시전선군 소속 사단 참모장에 올랐다. 독소전쟁에서 남일장군의 활약상을 직접적으로 확인하려면 소련군 주코프 원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코프 원수는 남일장군이 조선해방 후 재소대표로 평양에 금의환향하기 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코프 원수는 당시 소련군 최고의 전략 브레인으로 통한 사람이었다.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물론 연합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장군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만큼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전쟁을 승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이었다. 독소전쟁의 분수령이 됐던 1942년 스탈린그라드 대 전투를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도 바로 주코프 원수였다.

그는 훗날 종전 후 소련내에서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스탈린에 이어 제2인자로 군림했다. <2차대전사, 소련의 영웅-주코프 원수 참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45년들어 전쟁을 마무리할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베를린을 함락시켜 독일의 힘을 결정적으로 꺾겠다는게 목표였다. 소련군의 주력부대는 주코프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제 1 벨로루시 방면군이였고 이때 남일장군이 주코프 원수의 사단 참모장이 된 것이었다.

마침내 독소전쟁 최후의 전투, 베를린을 향한 마지막 공세가 1945년 4월 16일 막을 올렸다. 총사령관은 주코프 원수였고, 그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사람이 바로 남일장군이였다. 소련군은 베를린 전선에 4만대의 야포와 3,200대의 카츄샤 로켓포를 동원해 폭탄을 퍼부었다.

이때 사용된 포탄수가 2차 대전중 연합군이 사용한 포탄보다 많은 양이였다고 한다. 소련군은 약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베를린 외곽을 점령한데 이어 전투시작 10일만에 베를린 도시의 4분의 1을 장악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28일 베를린 중앙의 핵심시설이 점령됐고 4월 30일 밤 10시 30분에는 독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되는 제국의사당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해 소련국기인 적기가 게양됐다. 같은날 2차대전의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히틀러가 에바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후 청산가리를 먹고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다. 사실상 2차대전이 끝나는 순간이였다. 1945년 5월 8일 독일군의 공식 항복으로 독소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남일장군은 베를린 공방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공로로 소련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약 2만명에서 2만5천명이 전사했고, 독일측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45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됐다.

1941년 6월부터 45년 5월까지 4년여간 계속된 독소전쟁은 인류역사상 최대, 최악, 가장 잔혹했던 전쟁으로 꼽힌다. 독일군은 이 전쟁에서 532만8천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소련군은 765만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양측 군인들의 피해만 자그마치 1천200만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전쟁이였다. 남일장군은 독소전쟁기간 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이끈 사람이였다. 남한과 북한을 통틀어 당시 이 정도의 전투경험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육부상 역임
6.25때 인민군총참모장으로 수직상승

남일장군의 직속상관이였던 주코프 원수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백과사전>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는 소련의 승리를 전세계에 알리는 대대적인 전승퍼레이드가 벌여졌다. 소련의 관습에서는 승리한 부대의 사령관이 말을 타고 사열을 받는게 전통 관례였다. 관례대로라면 당연히 스탈린이 전승퍼레이드의 사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날 붉은 광장에서 말을 타고 사열을 받은 사람은 남일장군의 직속상관이였던 주코프 원수였다. 각종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나는 나이를 먹었으므로 말을 탈수 없지 않는가”라며 주코프에게 사열을 받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주코프 원수 주변에는 늘 남일장군이 있었다.

그후로 2개월 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2차세계대전은 공식적인 막을 내렸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조선 역시 해방을 맞았으나 남북은 분단돼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군이 지배하는 체제를 맞게 된다.

남일장군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의 정책에 따라 1946년 8월 말 재소(在蘇) 조선인 전문가 그룹 제4진으로 입북했다. 금의환향이었다. 남일장군은 소련점령군의 민사행정부인 로마넨코사령부 소속이였다. 9월 중순에는 88특수여단소속 빨치산파들이 원산에 도착했다.

이 두 그룹의 재소 조선인들은 초기에 주로 조선인 지도자들과 소련점령국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 그해 12월에는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의 조선인 거주지에서 선발된 80여명의 재소조선인들이 북한에 도착했다.

남일장군은 처음에 평양에서 소련군 군정청에서 근무하다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 차장으로 부임한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발족된 북한  최고 권력기구였다. 이중에서 교육국은 북한의 교육 대계를 총괄하는 부서였다.

교육국은 그해 8월 ‘초등 우리역사’ ‘중등 조선역사’를 발행했으며, 9월 15일 김일성종합대학 개교를 주도했다. 남일장군은 1948년 교육성 부상으로 승진한다.

남일장군의 평양 초창기 직책들을 보면 처음에는 군부 깊숙한 곳에 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 북한 인민군은 크게 세가지 분류가 있었다. 하나는 만주에서 항일게릴라전을 폈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였고, 또하나는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중국공산당 계열인 좌파조선인들의 집합체였다.

마지막이 남일이 소속된 소련파였다. 기본적으로 소련파는 소련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였고, 김일성 정권이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항일무장투쟁과는 먼거리에 있던 사람들이였다.

이 때문에 소련파는 초창기 북한에서 활동범위와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였다.<김학준. 미소냉전과 소련군정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참조>

남일장군이 남북정전협정 회담당시 중공군 대표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우측사진은 남일장군의 직속상관이였던 주코프 원수의 모습이다. <사진=위키백과사전>
이 때문에 남일장군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내에서 군부와 다소 먼 교육국에서 차장으로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2년만에 부상으로 승진하는 신속성을 보였다.

이후 그가 어떻게 북한인민군에 들어갔고, 1950년 9월 6.25가 한창이던 시절 북한군 총 참모장 강건이 전사하자 후임 참모총장으로 급 상승했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은 알려진게 없다. 그러나 북한이 6.25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련과 긴밀한 협의를 한 점으로 봐서, 소련통인 남일의 역할은 필수적인 일이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김일성이 남일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한 것은 필연적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 전후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가 1991년 6월 재소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자신의 회상록 '피바다의 비화'에 따르면 ‘김일성의 소련 방문 직후 민족 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전계획이 작성됐으며 소련군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유씨는 북한의 김일성은 50년 3월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 스탈린으로 부터 남침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후 약 한달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 작성에 들어갔으며 이 작업에 전쟁경험이 풍부한 소련 장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6·25 전쟁 작전계획은 독소전쟁등 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예프 중장, 포스트니코프 소장 및 기타 장군들과 영관급이 작전계획 작성에 주동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 시작됐다. 6.25 전쟁이야 말로 우리역사에 있어서는 안될 사건이였지만, 소련에서 엄청난 전투로 몸을 다져온 남일장군은 자신의 특기를 보일 수 있는 역사의 장이 열리는 순간이였다.

남일장군의 전임이였던 강건 초대 인민군총참모장은 1946년 중국에서 귀국해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을 지휘했던 사람이였다. 한국 전쟁에 총참모장으로 참전했다가 1950년 9월 고향과 멀지 않은 경북 안동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일장군이 그의 바톤을 이어받아 6.25 전쟁을 총 지휘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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