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 파편맞고 병원 후송되지 못하고 4일 동안 혼수상태로 방공호서 버텨

복부에 치명상, 수술 받았지만 끝내 운명
현장 지켜 본 김현승씨 60년만의 증언

1950년 9월 초 어느날이였다. 서울시 신당동 402-4 주택에 풍체 좋은 사람이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왔다. 6.25 전쟁이 한창이여서 서울시내가 거의 초토화된 시기였다.

이 사람은 당시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던 김영랑 선생이였다. 이 집은 9촌뻘인 강진의 김현호씨 형제들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살던 집이였다.

6.25가 터진후 후퇴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몸을 피하던 김영랑 선생이 어렵게 친척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은 것이였다.

김현호씨 형제들은 강진의 대표적 부호였던 비장네 집안의 손자들이였다. 김현호씨는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 4학년에 재학중이였고 그 아래 동생 김현영씨는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2학년이였다.

넷째가 현승이였는데 당시 12살로 서울 제동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였다. 아들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고 서울로 유학을 가자 강진의 갑부였던 부친(비장의 막내아들)이 서울에 큰 집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서 형제들이 함께 지내도록 한 곳이였다. 일본식건축이였는데 방이 많은 2층 다다미집이었고, 대지가 106평에 건평이 60평이 넘는 큰 집이었다.

영랑선생은 형제들의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넓은 1층 가운데 다다미방을 사용했다. 영랑은 이곳에서 보름정도 피신했다. 밖에는 전혀 나가지 못했다.

골목길을 산책할 때면 하늘에서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두꺼운 담요를 머리에 쓰고 다녔다. 넓은 집 마당에는 방공호까지 갖추고 있어서 공습이 시작되면 식구들이 모두 방공호로 들어가곤 했다.

해방직후인 1948년 11월 5일 강진에서 조성된 우익단체 강진치안대원들 사진이다. 지금의 경찰서 자리인데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시절이다. 우측의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있는 사람이 영랑선생이다. <사진 = 독자 김숙자님 제공>
이때 영랑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이 당시 12살 소년이였던 현승(76세)씨다. 그는 28세때인 1967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가 최근 귀국해 고향 강진을 방문했다.

그는 영랑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생존자다. 단순히 6.25때 적의 파편을 맞고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만 알려진 영랑선생의 최후 모습이 현승씨의 증언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진다.

영랑선생이 신당동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은지 보름 정도가 지난 9월 23일 경의 일이였다. 이미 그때는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마지막 서울수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고 간간히 국군의 차량들도 보였다. 서울 수복은 9월 28일에 이뤄졌지만 이미 국군이 서울시내에 들어왔던 것이다. 영랑선생은 그때까지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의 동쪽에 있던 부엌앞 처마아래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1950년 9월 23일 오후 시간이었다. 서울 신당동 주택에 갑자기 포탄 한발이 떨어졌다. 엄청난 굉음이 울려퍼졌다. 포탄이 떨어진 지점은 동쪽 부엌앞 담장이었다. 부엌과 담장은 불과 12~15m에 불과했다. 부엌앞 처마밑에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영랑선생과 현승씨의 둘째 형이었던 현영씨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식간에 파편이 두 사람을 덮쳤다. 포탄이 떨어진 시간, 소년 현승군은 다른 사람들과 방공호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온몸에 피가 낭자한 영랑선생과 형님 현영씨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공호 계단을 내려왔다. 영랑선생은 복부와 다리에 피가 낭자했고, 현영씨는 왼쪽팔이 거의 벌집이 되어 있었다.

병원을 가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을 연 병원도 없었거니와 환자를 싣고 길을 나섰다가는 언제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방공호에서 4일을 보냈다.

응급조치래야 집에 있던 ‘옥도징끼’를 뿌려주는게 고작이였다. 9월말 방공호는 고온다습했다. 파편이 박힌 상처가 썩기 시작했다. 영랑선생은 그곳에서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실신을 반복했다.

“4일 동안 반공호안이 온통 신음소리 뿐이였어요. 물론 잠을 자지도 못했죠. 주변 어른들이 여기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어떻게 해서든 병원으로 데려가자고들 했지요” 현승씨에게 특명이 내려졌다. 밖에 나가서 어떻게 해서든 마대포대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어린 현승씨는 겁 없이 거리로 나섰다. 마대 두 개를 어렵게 주워 서 집으로 왔다. 어른들은 그것으로 당가를 만들었다.

8월 27일 밤 12시쯤 됐을 것이다. 캄캄한 밤에 두 사람을 당가에 싣고 거리로 나갔다. 주요도로는 모두 통제되고 있을 때다. 현승씨도 영랑선생을 태운 당가의 한쪽을 잡았다. 일행은 경비망을 뚫기 위해 시구문을 택하기로 했다.

시구문은 현재 서울 중구 광희동 2가에 있는 광희문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성문밖으로 시체를 내가던 문이었다. 그만큼 후미진데 있었고 경비도 허술한 곳이였다.

일행은 시구문을 빠져나가 두어시간을 헤맨 끝에 어렵게 ‘내과의원’ 간판을 발견했다.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시라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곳에서도 시간이 30분간이나 지체됐다. 간절한 외침끝에 어렵게 문이 열렸다. 내과병원에서 파편제거 수술이 시작됐다. 사고가 난 후 거의 4일만이었다. 영랑선생의 상처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였다. 복부아래 파편을 제거했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의 나이 48세때의 일이었다.

김현승 선생은 “영랑선생은 복부외에 다른 곳에 큰 상처가 없었지만 급소를 맞은 것 같았어요. 하도 다급한 상황이라 내과병원에서 외과수술을 받은 것이였는데 그것도 상황을 어렵게 한 일이였지요.

28일 서울이 수복됐으니 그것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겁니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같이 파편을 맞았던 현승씨의 형 현영씨는 수술이 성공적이었다. 훗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턱밑에서 작은 파편이 하나 발견됐다. 그는 평생 그 파편을 몸에 담고 살다 2011년 81세의 나이로 영랑선생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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