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숙청계기, 윤순달·남일장군의 삶 다시 조명받아

윤순달
남일
김정은에 의한 장성택의 숙청은 북한사회의 폐쇄적인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6.25전후에 북으로 간 강진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북한내에서 최고위직에 올랐다가 처절한 숙청으로 한평생을 감옥에서 보냈거나 참혹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있다.

윤순달과 남일. 모두 김일성 시대부터 북한에서 이름을 날렸던 강진출신 인사들이다. 김정은의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매형인 장성택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서 윤순달과 남일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 그들은 김일성과 공산주의에 평생 충성한 엘리트들이였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북으로 간 강진사람 윤순달, 남일의 최후
그들의 운명은 무엇이 갈랐나

대구 출신 윤순달
차관급으로 활동, 1952년 간첩테러혐의로 체포
60년형 선고… 살아 있다면 지금도 수감생활

윤순달선생이 1941년 광주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근현대의 현성과 지역 사회운동>
북한에서 대대적인 숙청의 바람이 불고 있다. 김정은은 최근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곧바로 총살시켜버렸다. 장성택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평생 충성했던 사람이다. 1인 독재체제의 북한에서는 권력층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운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강진 출신중에 북한으로 가서 최고권력층에 올랐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 있다. 윤순달과 남일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윤순달은 6.25 당시 빨치산부대 최고 사령관까지 지내다 월북해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연락소부소장(차관급)까지 올랐으나 김일성이 박헌영계파를 숙청할 당시 체포돼 60년 형을 선고받고 평생 교도소에서 삶을 보냈다.
 
남일은 6.25때 인민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이후 외무상과 부수상까지 지냈으나 1976년 2월 김정일에 의해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고로 사망했다.

윤순달은 1914년 대구면 수동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해방이전부터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 1934년 20세의 나이에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원으로 활약했고, 26세때는 경성콤그룹 전남책임자가 된다.

1949년에는 박헌영 계열로 승승장구하면서 사단장급에 해당되는 남로당 조직부장 대리가 됐고, 1952년에는 차관급에 해당되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연락소부소장까지 올랐다. 북한쪽 입장에서 보면 당과 인민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람이다.

윤순달은 1952년 북한에서 김일성이 박헌영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할 때 동료 12명과 함께 간첩혐의로 체포된다. 그의 정확한 혐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 선동행위’였다. 그의 나이 38세때의 일이다. 윤순달은 징역 60년형을 선고받는다.

윤순달은 1994년 8월초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가 발표한 ‘북한 승호리수용소에 수감중인 20명의 정치범 명단’에 끼여 있었다. 38세에 감옥살이를 시작해서 4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는 그의 나이가 99세가 되는 해이다.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60년형을 아직 채우지 못하고 감옥에 있을 때다. 그가 살았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병영 출신 남일
인민군참모총장·부수상·정무원부총리까지 역임
세습반대하자 1976년 김정일이 교통사고 위장 숙청

남일장군이 지난 1951년 6.25 정전협상때 북한 대표로 활동할 당시 회담장을 나오던 모습이다.
남일장군은 1915년 병영에서 태어났다. 남일장군의 북한내 경력은 화려하다. 19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 차장, 1948년 교육성 부상, 1950년 9월 북한군 총참모장, 1953년 7월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수석대표로서 휴전협정 서명, 1953년 외무상, 1954년 제네바 국제평화회담 북한측 수석대표, 1957년 부수상, 1966년 철도상, 1972년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76년 김정일 세습을 반대하다가 교통사고를 위장한 사고로 사망했다.
외신보도와 정보기관 분석, 탈북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남일 부총리는 1976년 2월 평남 안주의 남흥청년화학공장을 시찰한 뒤 관용 벤츠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안공항 부근 도로에서 군용 트럭과 충돌, 현장에서 사망했다.

2000년대 북한을 나온 탈북자는 “당시 김일성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김정일은 이복동생 평일을 지지하는 남일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며 “자신의 수족인 호위2국을 동원해 남일을 살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고향을 떠나 공산주의라는 이상향의 나라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젊음을 바쳐 일했으나 결국 권력의 장애물로 생각한 최고권력자에 의해 비참하게 제거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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