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성한 병역의무를 학생 처벌수단으로 악용하는가”

좁은 지프에서 새우잠 자며 선거운동
공화당 길전식 후보에 이어 2위 당선

1973년 9대 총선에서 당선된 황호동 의원이 고향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한 주민으로부터 축하주를 받고 있다. <사진= 고 이형희 전 문화원장 제공>
황호동 선수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9대 국회의원선거는 유신체제하인 1973년 2월27일 실시됐다. 선거 방식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던 8대 총선 때와 달리, 선거구별로 다수득표자 2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6대 총선부터 8대총선까지 영암과 한 선거구를 이뤘던 강진은 9대 총선부터 인근 장흥․영암․완도와 한 선거구(전남 제8선거구)를 이뤘다. 전남 제8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는 길전식(吉典植․49, 공화당) ․ 정간용(鄭幹鎔․51,공화당) ․ 황호동(黃鎬東․37,신민당)후보 등 모두 3명. 공화당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강진 장흥 완도 지역구에서 2명의 후보를 복수 공천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길 후보는 장흥, 정 후보는 완도, 황 후보는 강진 등 세 후보의 출신지가 모두 달랐다. 처음으로 한 선거구가 된 4개 군 중에서, 영암만 제외하고 군별로 1인씩 출마했다. 황후보 입장에서 그렇게 불리한 구도는 아니였다. 일단 강진에서는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고향표를 결집시킬수 있었고, 완도와 장흥, 영암등에 산재해 있는 야당성향의 표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선거전은 초반 집권당인 공화당 두후보의 2강 양상으로 가고 있었다. 길후보는 물론 완도의 정후보 역시 만만치 않은 후보였던 것이다.  길 후보는 서울 경복고와 연희대(현 연세대) 문과를 졸업하고 육사(8기)에 들어가 방첩부대 정보처장 시절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공화당 실세였다.

5․16이후 대령으로 예편해 중앙정보부 3국장과 공화당 원내부총무, 국회 상공위원장, 공화당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5․16후 6대 총선부터 10대 총선까지 내리 다섯 번 입후보해 한 번의 낙선도 없이 5선을 기록, 승률 100%를 기록했을 정도로 선거전에 능했고 막강한 집권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완도의 정간용 후보 역시 7․8대 국회의원을 지낸 현역의원으로 완도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강적이었다. 의협심이 강했던 황후보는 국가대표를 그만두고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사표를 내고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정치신인일 뿐이었다.

황 후보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역도선수로 여러 차례 출전해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지만 야당후보로서 유신헌법체제하에서 치르는 선거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복수당선을 자신하고 있었다.

황호동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전국체전 전남대표로 참석해 역도 헤비급 은메달을 차지하는 순간.
그러나 서서히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초반에 공화당후보들에게 쏠리던 관심이 황호동 후보에게도 모아져 선거전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3파전 양상을 보였다. 선거 종반에 황 후보가 맹추격전을 벌였다. 이에 긴장한 길 후보는 같은 당 정 후보에게 출신지인 완도 외 지역은 선거운동 금지를 지시하기도 했다.
한 선거구에 4개군이 포함되면서 후보들의 선거운동도 버겁게 진행됐다. 황후보는 좁은 지프속에서 한 두시간씩 새우잠을 자며 선거운동을 강행했다. 상황은 많이 호전되고 있었다.

드디어 투표날이 왔다. 투표는 큰 문제없이 진행됐으나 개표과정에서 일이 발생했다. 개표가 진행중인데 공화당후보의 지지표가 몇장이 겹쳐서 나온 것이었다. 한 사람이 여러장에 도장을 찍었다는 증거였다. 현장에서 상황을 보고 받은 황후보가 즉시 개표장으로 뛰어들어가 투표함을 깔고 앉아 버렸다.

누가 감히 거구의 황후보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후보는 장장 10시간 동안 투표함에서 버티고 앉아 내려오지 않았다. 운동선수 출신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보는 훗날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힘으로 선거에서 이겼다”고 호탕하게 말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길전식 후보와 황호동 후보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길 후보는 유효득표수(20만3천220표)의 43.81%인 8만9천35표를 득표해 4선에 성공했다. 황 후보는 유효득표수의 28.65%인 5만8천218표를 얻어 2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정간용 후보는 황 후보 보다 2천251표가 적은 5만5천967표(27.54%)를 획득해 3위를 기록, 3선 도전에 실패했다. 황후보가 정후보에게 물을 먹인 결과였다. 완도는 정 후보의 낙선으로 복합선거구가 된 9대 국회부터 15대 국회까지 27년 동안 완도지역 출신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학원문제 큰 관심
전남체전 전남도대표 출전 은메달 획득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달라’ 대한체육회 제안

국회에 진출한 황호동 의원은 이철승 국회부의장의 계보임을 확고히 하며 국방위원회에 배치된다. 황의원은 이철승 부의장과 광화문 건너편에서 사무실도 함께 사용했다. 그 때 방을 함께 사용했던 의원들이 황의원과 함께 양해준, 오세응, 고재청의원등이었다.

당시 묘하게 거리를 하나사이에 두고 김영삼 부총재의 사무실이 있었는데, 상도동계 의원들이 나란히 들어와 있었다. 그때 김영삼 부총재와 방을 함께 사용했던 의원들이 김동영, 최형우, 황낙주, 박용만, 신상우 의원등이었다. 이들은 훗날 김영삼 부총재를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철승 부의장이 승승장구했다면 황호동의원 역시 권력의 핵심부까지 갈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이철승과 김영삼의 정치역정이 엇갈리면서 황의원 역시 이철승 부의장과 같은 운명이 됐던 것이다.

황의원의 여러 가지 의정활동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학원사태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정부는 유신헌법하에서 긴급조치를 위반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강제로 군대를 보내고 있었다.

황의원은 그해 정기국회에서 “정부는 제적된 대학생들에 대해 징집영장을 발부하고 있는데 지금 군대내에서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유추구자가 그렇게 필요한 형편인가. 왜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학생들을 처벌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느냐”고 따졌다. 당시 유신체제의 삼엄한 분위기에서 예민한 국방문제를 거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해, 전남에는 전국체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전남은 70년 전국체전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스포츠가 강한 지역이였으나 71년에는 8위, 72년에는 7위로 만년 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 김재식도지사는 각 시군을 돌며 건설사업을 일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체육을 육성하라고 시장 군수들에게 강력하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전남선수들도 고향의 명예를 걸고 출전할수 있게 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황호동 의원에게도 전남도 대표로 출전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황의원은 “전남체육발전을 위한 자극제가 됨과 동시에 전남선수단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출전했다”고 기염을 토했다. 황의원의 나이 38세때의 일이다. 황의원은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역도 헤비급에 출전한다. 경기결과 황의원은 인상에서 120㎏, 용상에서 140㎏을 들어 올려 종합 260㎏을 들어 올렸다. 이 기록은 왕년에 자신의 기록인 330㎏ 보다 70㎏이 모자란 것이였지만 현역 국회의원이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낸 일은 정가에서 단연 화제거리였다.

1974년 2월 우리해군 159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충무앞바다 해군보조선 침몰현장.
1974년 2월 우리 해군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고가 발생한다. 2월 22일 오전 경남 충무항 앞바다에서 해군병력을 실은 보조선이 침몰해 159명이 사망한 것이다. 사망자는 대부분 해군과 해경 신병들이여서 충격이 더 컸다. 황호동 의원은 긴급하게 열린 국회국방위에서 사망 군인들을 위해 묵념을 올릴 것을 제안하며 “평상시 해군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해이됐으면 이런 사고가 발생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1974년 6월이 됐다. 야당인 신민당내에서는 유진산 총재가 건강문제로 사퇴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당권경쟁이 벌어졌다. 김영삼 부총재와 이철승 국회부의장이 당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황의원은 이때 이철승 부의장의 전남지역 총책을 맡아 대의원을 포섭했다.

그해 9월에는 제7회 아시안게임이 테헤란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어느날 대한체육회로부터 황의원에게 연락이 왔다. 9월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역도헤비급 선수로 출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체육회측은 황의원이 110㎏이상이 출전하는 수퍼헤비급에서 출전해 주면 다른나라에 이렇다할 선수가 없기 때문에 금메달은 문제가 없을 것이란 자체 분석도 내 놓았다.

그러나 황의원은 신민당내의 당권경쟁이 한창일 때라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황의원에게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도록 결정적인 힘을 준 사람들이 바로 이철승부의장 계보 의원들이었다. 측근들은 “당권경쟁보다 국위선양이 더 중요하다”면서 황선수의 출전을 적극 권유했다. 황의원은 결국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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