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거인’별명… 헤비급 국내 최고 선수 등극

박정희 대통령 “벗은 몸 보니 정말 대단하다”
66년 방콕아시안게임 출전해 은메달 획득

66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황호동 선수(우측)이 거구의 몸을 뽐내며 마지막 훈련을 하고 있다. 황선수는 이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바로 옆 선수가 역도 라이트헤비급의 이종섭 선수인데 두 사람의 신체크기 차이가 많이 나 보인다. < 동아일보 66년 12월 8일자 신문 참조>
1966년는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30세의 황호동 선수는 일찌감치 헤비급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이제 아시아의 거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체중 113㎏으로 470㎏의 역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3회 아시안게임 2위, 로마 올릭픽 9위, 동경올림픽 8위라는 굵직한 출전기록을 가지고 있었고, 국내 역도대회에서는 헤비급을 거의 독식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그는 그해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지역에 헤비급 선수가 드물다지만 선수층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승리가 쉬운게 아니다”고 여전히 이란선수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전통 강호 이란과 함께 동경올림픽에서 선전한 일본이 중량급 강자로 점쳐지고 있었다. 황호동 선수의 말대로 헤비급이 선수층은 얇았지만 단 몇 명의 실력으로 금메달과 실격이 엇갈렸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후 고려대학교에서는 재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고려대역도부가 주최한 제5회 미스터고대 선발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에 5월 축제때 가장 아름다운 학생을 뽑는 메이퀸 선발 행사가 있었다면 고려대학교에는 미스터고대선발대회가 있었다. 졸업생이었던 황호동 선수는 이 행사에 초청돼 역도시범을 보여주었다. 요즘은 대학축제때 아이돌 공연이 당연 히트지만 당시에는 각종 행사에서 역도시범 경기가 큰 인기였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는 황호동 선수의 헤비급 몸집은 대학가의 큰 화제였다. 

12월 초 우리나라는 방콕대회에 선수 179명, 임원 40명, 예술단 10명, 임원 2명등 231명 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역대 국제대회 중 최대 규모였다. 12월 태국의 수도 방콕은 무더웠다. 황호동 선수에게 이상한 불행이 찾아왔다.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설사병에 걸린 것이다. 물 한모금이라도 더 먹어서 체중을 늘려야하는 헤비급선수에게 설사병은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황선수는 단 이틀만에 체중이 3㎏나 줄어드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황선수는 설사가 어느정도 잡히자 쉬지 않고 음식과 물을 섭취해야 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당시 황선수가 체중을 늘리기 위한 음식량은 선수촌에서 단연 화제였다. 역도는 물론 권투, 레스링등 체급경기 선수들은 무더운 방콕의 날씨속에서도 샤워시설이 좋지 않아 목욕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땀을 빼서 체중을 조절해야 할 선수들이 목욕시설 부족으로 땀을 빼지 못하자 부득이 음식을 적게 먹으며 체중을 잡아가야 했다. 그러나 설사병으로 체중이 줄어든 황호동 선수는 오히려 더 많이 먹으며 체중을 늘리고 있었다.

황선수의 식성을 본 한 권투선수는 “운동도 헤비급을 해야 먹을 것도 맘대로 먹는다”고 투덜거렸다고 동아일보는 썼다.<동아일보 66년 12월 8일자 참조>

설사병 때문이었을까. 황호동 선수는 455㎏을 들어 아깝게 은메달 획득에 그치고 말았다. 금메달과 동메달은 걱정했던 이란선수들이 싹쓸이 하면서 중량급 강국으로 다시한번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황선수가 아쉬운 은메달에 그쳤지만 대한민국은 18개 참가국중에 종합성적 2위로 당초 목표를 달성하면서 금의환향했다.

68년 멕시코 올릭픽서 예선탈락 불운
현지서 은퇴선언, 20년 선수생활 마감
파란만장한 정치인생 시작돼


좌측 사진은 66년 박정희대통령이 방콕아시안게임 훈련이 한창인 태릉선수촌을 찾아 황호동선수를 만나 반갑게 악수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측은 황호동선수의 방콕아시안게임 은메달 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동아일보 12월 27일자에는 각 감독들의 좌담회내용이 나오는데 당시 국제대회 문화를 알수 있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해외에 나가면 선수들이 김치 고추장을 찾아요. 여기에서 준비해 가지 않으면 현지에서 조달할 수 없는 물품이기 때문에 여간 딱하지 않거든요. 심지어 김치 고추장을 먹지 못한 선수들은 스태미너가 부족해 실격할지 모른다는 미신에 까지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건 선수들의 중대한 정신적인 위험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훈련할 때 김치 고추장을 안먹는 훈련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동아일보 66년 12월 27일>

김치와 고추장을 해외 현지에서 구할수 없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아예 김치와 고추장을 먹지 않고 훈련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여러 선수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누구보다 힘을 써야 하는 황호동선수가 김치를 찾았을듯 싶다. 그러나 요즘에는 김치와 고추장이 특별기편으로 세계 어디든지 운송되기 때문에 선수들이 따로 김치없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됐다.

1968년이 왔다. 황호동 선수의 나이도 이제 32세로 현역선수치곤 중년의 연배가 됐다. 그해는 9월에는 멕시코올릭픽이 열렸다. 황선수는 동경올림픽에 이어 잇따라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는다.

그해 여름 멕시코 올릭핌 대표선수들이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때다. 8월 9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이 예고없이 선수촌을 찾았다. 당시만해도 박대통령의 위상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떴다하면 선수촌 전체가 긴장과 영광의 분위기에 휩쌓이곤 했다.

박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왔다. 박대통령은 선수들의 급식비로 보태쓰라며 금일봉 200만원을 전달했고 육영수 여사는 과일을 선물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박대통령이 역도 훈련장에서 거구의 황호동 선수를 보았다. 박대통령은 황선수에게 다가가 “옷 입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벗은 몸을 보니 대단하군”하면서 황선수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박대통령이 황선수의 벗은 몸을 보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는 내용은 큰 화제가 됐다. 다음날 모든 신문에 이 소식이 재미있게 실렸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멕시코 올림픽 준비에 갑자기 난관이 찾아왔다. 국방부에서 갑자기 병역미필선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방부 조사결과 남자 올림픽 대표 41명중 12명이 병역미필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에 황호동 선수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귀국 후 병역을 마치겠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국방부로부터 해외여행 추천을 받아 올림픽에 참가할수 있었다. 그후 황호동 선수의 병역문제가 어떻게 매듭됐는지 알 수 없다. 국제대회에서 국위선양에 앞장선 국가대표선수였지만 황선수가 32세까지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병역면제 혜택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이 멕시코에서 고도적응 훈련을 하고 있을 때 북한의 동향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다. 북한이 멕시코 올림픽에 참가할지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북한은 그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란 국호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IOC측에 요청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번번히 올림픽을 보이코트하고 있었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대표단이 쿠바까지 이동해 평양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우리 대표팀은 잔뜩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대결이 열리면 누가 이기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텐데 당시까지만해도 우리 체육 실력은 북한을 이긴다는 장담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에는 육상 여자 800m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신금단 선수가 있었고, 66년 열린 런던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를 꺾고 8강전에 진출한 스포츠 강국으로 꼽히고 있었다. 북한이 오랫동안 나라 명칭을 시비삼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게 한국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였던 것이다.<오도광. ‘나의 스포츠기자 시절’ 참조>

이같은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국내 언론들도 선수들의 사기에 큰 관심을 가지며 북한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황호동 선수를 인터뷰 했다. 황선수는 “우리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이상 북괴의 출전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나는 북괴선수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싶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북한은 결국 멕시코올릭픽에 참가하지 않는다. 북한은 1972년 뮌헨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참가한 나라로 분류된다.

1968년 10월 20일 새벽(한국시간) 멕시코국립극장에서 역도경기가 개막됐다. 황호동 선수는 헤비급 예선경기에서 실격하고 만다. 황선수는 이날 국내기록보다 2.5㎏이 적은 160㎏에 세 번씩이나 도전했으나 끝내 들어올리지 못해 인상과 용상경기는 출전도 못한채 자격을 상실했다. 국가대표로서 적지 않은 수치였다. 신문들은 “황호동 선수의 실격은 한국선수단을 완전히 실망시켰다”고 적었다.

다음날 황호동 선수는 현지에서 현역선수생활을 그만 두겠다는 은퇴를 선언하고 쓸쓸하게 귀국길에 오른다. 어렷을 적 강진중학교에서 역도를 시작한 후 20여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현역 선수생활을 접었지만 그의 앞에는 정치라는 파란만장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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