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선출 중선거구제 도입... 강진.장흥.영암.완도 한 선거구

황호동 의원
길전식 의원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유신체제하인 1973년 2월27일 실시됐다. 9대 총선은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 3권을 완전 장악하도록 한 ‘유신헌법’에 따라 경직된 가운데 치러졌다. 8대 국회 만료부터 9대 국회 임기 개시까지 5개월여 동안 국회가 없었는데, 이때는 ‘비상국무회의’가 국회 기능을 대신했다.

선거 방식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던 8대 총선 때와 달리, 선거구별로 다수득표자 2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또 전국구 제도를 폐지하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제청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국구 성격의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 국회의원을 간접 선출했다.

같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어도 어떻게 선출됐느냐에 따라 임기가 달랐다. 지역구 의원의 임기는 의정사상 가장 긴 6년이었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한 유정회 의원의 임기는 3년이었다. 제3공화국 때에는 허용하지 않았던 무소속 출마를 허용했고, 후보자 기탁금제도를 도입했으며, 무투표 당선을 인정했다. 의원 정수는 지역구 146명, 유정회 73명 등 모두 219명.

선거결과는 지역구 의원 146명(73개 선거구) 중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 73명, 신민당 52명, 민주통일당 2명, 무소속 19명이 각각 당선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73년 3월 7일 11개 시․도별 지역회의를 열고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73명의 국회의원 후보를 95.63%의 지지로 선출했다.

이들은 ‘유신정우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원내 전위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유신정우회는 공화당의 친위집단이어서 공화당은 실질적으로 146명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함으로써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반토막 선거’라는 비난을 받았고, 유신독재에 따른 정치적 자유의 위축으로 경쟁률도 2.3 대 1로 낮았다.

 
길전식, 정간용, 황호동 출마
윤재명 의원은 타의에 의해 불출마

6대 총선부터 8대총선까지 영암과 한 선거구를 이뤘던 강진은, 9대 총선부터 인근 장흥․영암․완도와 한 선거구(전남 제8선거구)를 이뤘다.  

전남 제8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는 길전식(吉典植․49, 공화당) ․ 정간용(鄭幹鎔․51,공화당) ․ 황호동(黃鎬東․37,신민당)후보 등 모두 3명. 공화당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2명의 후보를 복수 공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길 후보는 장흥, 정 후보는 완도, 황 후보는 강진 등 세 후보의 출신지가 모두 달랐다. 처음으로 한 선거구가 된 4개 군 중에서, 영암만 제외하고 군별로 1인씩 출마했다.

<전남 제8선거구(장흥․강진․영암․완도) 제9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길전식

(49)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46

국회의원

연세대 문과 졸, 육사 8기 졸,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6~8대 의원(3선)

민 주

공화당

89,035

(43.81%)

정간용

(51)

 

완도군 완도읍 군내리 2구 736

국회의원

일본대학 법과 졸, 완도수고 교감,한국수산기술협회장, 민주공화당 완도지구당위원장, 7․8대 의원(재선)

민 주

공화당

55,967

(27.54%)

황호동

(3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목동 318-136

농업

강진농고, 고려대 경제과 졸, 신민당 전남제8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중앙당무위원

신민당

58,218

(28.65%)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선거전은 공화당 후보인 길전식․정간용 후보와 신민당 황호동 후보의 정당대결로 진행됐다. 한 선거구에서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바뀐 이후 처음 치러지는 총선이어서 3명 후보 중 1명만 탈락하는 선거였다.

길전식 후보는 당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실세이자 3선(6~8대) 의원 출신이고, 정간용 후보는 완도수고 교감을 지냈고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완도선거구에서 7,8대 의원을 지낸 재선의원 출신. 정치 신인 황호동 후보는 올림픽에 국가대표 역도선수로 여러 차례 출전해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선거전은 초반에 공화당의 길 후보와 정 후보가 우세한 가운데 진행됐으나, 선거전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3파전 양상을 보였다. 선거 종반에는 올림픽 역도선수 출신인 황 후보가 맹추격, 치열한 3판전으로 전개됐다. 이에 긴장한 길 후보는 같은 당 정 후보에게 출신지인 완도 외 지역은 선거운동 금지를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 길전식 후보와 황호동 후보가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길 후보는 유효득표수(20만3천220표)의 43.81%인 8만9천35표를 득표해 4선에 성공했다. 황 후보는 유효득표수의 28.65%인 5만8천218표를 얻어 2위로 금배지를 달았다.

정간용 후보는 황 후보 보다 2천251표가 적은 5만5천967표(27.54%)를 획득해 3위를 기록, 3선 도전에 실패했다. 완도는 정 후보의 낙선으로 복합선거구가 된 9대 국회부터 15대 국회까지 27년 동안 완도지역 출신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출마가 예상됐던 윤재명 의원(7,8대 의원)은 불출마했다. 선거구가 인근 지역과 통합되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 윤 의원은, 선거운동용 달력까지 인쇄해 놓고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길전식 후보가 윤 의원에게 “유정회 의원으로 추천하겠다”고 선거지원을 부탁해 그 약속을 믿고 불출마했다.

그러나 길전식 후보는 윤 의원을 유정회 의원으로 추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윤 의원은 9대 국회에 도전하지도 못하고 정치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 맡아 정권 실세로 부상
황호동,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출전 은메달 획득

민족중흥회 회장인 길전식 전 의원(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위원장)이 2009년 10월 26일 오전 국립 서울 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대통령 추모식에서 추도사를 읽고 있다.
남강(南崗) 길전식 의원(1924.10~2011.12)은 장흥군 장흥읍 기양리 출신이다. 길 의원은 서울 경복고와 연희대(현 연세대) 문과를 졸업하고 육사(8기)에 들어가 방첩부대 정보처장 시절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육사 동기인 길 의원은 5․16이후 대령으로 예편, 중앙정보부 3국장과 공화당 원내부총무, 국회 상공위원장, 공화당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말을 타기 위해 군에 입대했을 정도로 승마애호가였던 그는,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지낸데 이어 KOC부위원장 겸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민족중흥회 회장을 지냈다.

길 의원은 5․16후 6대 총선부터 10대 총선까지 내리 다섯 번 입후보해 한 번의 낙선도 없이 5선을 기록, 승률 100%를 기록했다. 1971년 공화당내 구주류가 대거 퇴진한 ‘10․2 항명파동’(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 가결)을 기점으로 당 운영의 전면에 등장했다. 

길 의원은 8년간이나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당무와 자금, 공천을 주무르는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치밀하면서도 구김이 없는 성품으로 야당과 두루 교류했으며, 군 출신이면서도 군 색채가 드러나지 않았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지난 2011년 12월 21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전까지도 민족중흥회 회장을 맡아 대외활동을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었다.

황호동 전 의원이 1974년 제7회 테헤란아시안게임에 현역 국회의원 신분으로 출전, 은메달을 땄다. /강진신문 제공
황호동 의원(1936.12~2010.3)은 이색 정치인이었다. 강진군 대구면 백사리에서 태어난 황 의원은, 강진농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국가대표 역도선수 출신.

지난 1958년 일본 도쿄 아시안게임(은메달) 출전을 시작으로 64년 도쿄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금메달), 68년 멕시코 올림픽,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메달)까지 아시아를 대표한 역사(力士)였다. 젊은 시절 그는 키 180cm에 몸무게가 110kg이나 되는 당시로선 거구였다. 

특히 황의원은 현역의원 신분으로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슈퍼헤비급에 출전, 은메달을 획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선수생활에서 은퇴하고 6년 후인 74년 현역 국회의원 시절이었다.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북한과 메달경쟁을 할 것 같으니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동메달이라도 따 달라”고 부탁하자, 기꺼이 응해 은메달을 획득했었다. 현역 국회의원이 국제대회 선수로 출전했던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황의원은 선수로선 나이도 많았고, 체중도 5kg이나 미달돼 탈락위기에 처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맹물을 엄청나게 마셔 겨우 체중(110kg)을 맞춘 뒤 계체량 측정을 통과하고 출전했다. 황 의원은 이란선수에게 져 은메달을 따는데 만족해야 했다. 

의협심이 강했던 황의원은,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사표를 내고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신민당 청년부장과 국장을 거쳐 9대 총선 때, 장흥․강진․영암․완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황의원은 신민당 당기위 부위원장, 지도위 부의장, 정무위원, 한․이탈리아친선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0대 총선 때 재선에 도전했으나 패배한 황의원은, 80년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못했다. 이후 88년 신한민주당(신민당) 정책심의위원장을 맡아 정치재개를 노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010년 3월 1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길전식 의원의 10대 국회 때의 정치행적이나 일화 등은 <10대 국회>편에서 소개할 예정임. 강진일보 홈페이지 참조.)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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