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거구 국회의원 132.5㎏ 바벨‘번쩍’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은메달
중3 체격이 키180㎝에 몸무게 80㎏
맞은 신발, 옷 없어 남대문시장서 미군 것 구입

1974년 9월 6일 오후 3시 이란의 수도 테헤란. 제7회 아시안게임이 뜨거운 열기속에 열리고 있었다.
7회 아시안게임은 동서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굳게 문을 잠갔던 공산진영이 처음으로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국제행사였다.

각국은 ‘평화와 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스포츠대회라고 평가했지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특히 6.25 전쟁 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만난 남한과 북한에게 아시안게임은 피튀기는 전장터였다. 우리는 여전히 북한선수를 북괴선수로 부르고 있었다. 

이날의 관심 경기는 역도 경기였다. 110㎏ 이상 거구들이 참가하는 슈퍼헤비급 무제한 경기가 열렸다. 테헤란 시민들의 눈이 이곳에 집중됐다. 이란대표선수가 결승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현지 한국인들도 경기장에 몰려들었다.

역시 결승에 오른 대한민국 황호동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키 180㎝, 몸무게 110㎏, 나이 40세의 황호동 선수가 무대에 올랐다. 그가 큰 관심을 받았던 것은 한국의 현역 국회의원이라는 점 때문이였다.

자신감 있게 바벨을 잡은 황호동 선수가 엄청난 기합소리와 함께 132.5㎏짜리 역기를 들어 올렸다. 황호동 선수에 이어 이란 대표선수가 나왔다. 장내는 테헤란 시민들의 응원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일방적인 응원이었다. 이란 대표선수가 바벨을 들어 올렸다. 133㎏이었다. 결국 금메달은 이란에게 돌아가고, 한국의 국회의원 역사는 은메달을 따냈다. 북한은 동메달이었다.

다음날 난리가 났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이 ‘한국VIP 역도 은메달’이란 제목으로 황호동 선수 인터뷰와 함께 이 소식을 보도 했고, 국내 일간지들 역시 황호동 선수, 황호동 국회의원의 역도 은메달 소식을 1면에 배치했다.

타고난 반골,태릉선수촌서 박정희 대통령 TV에 나오자
“저 사람 왜 또 나오는 거야” 소리지르다 안기부행


1974년 9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역도 무제한급에 출전한 황호동 선수가 바벨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가한 당시 아시안 게임은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큰 화제가 됐다.
국회의원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은 지금도 전무후무하다. 황호동 선수의 선전등에 힘입어 한국은 금 16, 은 26, 동 15개를 획득해 종합 4위를 차지했다. 관심을 모았던 남북한 스포츠 대결에서는 사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한국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황호동 국회의원의 은메달 획득 소식이 국내에 전해 오면서 국회도 잔치분위기였다.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있는 이색적인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일권 국회의장과 김영삼 신민당총재가 즉각 축전을 보냈고 황호동의원의 계보 보스였던 이철승 국회부의장은 “6년 동안 운동에서 손을 떼었던 그가 입상한 것은 나라의 명예를 위한 투지의 결과”라고 찬사를 보냈다.<동아일보 1974년 9월 6일자 참조>

그해 8월, 강진은 큰 수해를 당했었다. 경향신문보도에 따르면 태풍 '리타'의 영향으로 그해 8월 30일 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강진과 장흥, 영암에 393㎜의 폭우가 쏟아져 탐진강이 범람했다.

목리앞 탐진강 둑이 100m 정도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목리와 남포 들판이 물바다가 됐다. 이재민이 967명 발생해서 인근 초등학교로 긴급 수용됐다. 군동단위조합 양곡창고가 침수되기도 했다.

주변 평리, 갈전리, 오산리 등도 피해권에 들어가 집들이 지붕만 보일 정도로 물이 찼다. 당시 강진의 공식적인 피해액은 8억1천300만원에 달했다. 특히 그해 추석은 9월 30일이었는데 이재민들이 추석 차례를 임시 천막에서 지낼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 강진 출신 국회의원의 아시안게임 은메달 획득 낭보가 들려온 것이다.

강진읍의 한 주민은 “당시 강진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황호동의원이 그전 국제대회에서도 메달을 많이 땄지만 그것은 일반 선수시절이었고, 테헤란 아시안게임 은메달은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목리와 남포가 거의 물에 잠길 정도의 수해를 당하면서도 주민들이 큰 자신감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당시 황의원을 대신해서 수해를 당한 지역구에 다녀 온 임정덕여사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적적인 일로 기쁘지만 선거구의 수해민의 참상이 더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기도 했다.

황호동의원의 메달 획득 소식에 국회와 온 나라가 떠들썩 했지만 정작 박정희 대통령은 뜨악해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구체적으로 후술하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이 이상한 일만 하려고 하면 몸으로 막아대는 이 거구의 신민당 국회의원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호동의원은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다 TV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오자 욕설을 하면서 “저 ××, 왜 또 나오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두 차례나 선수촌에서 며칠씩 사라졌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있는 남산에 끌려갔다 왔던 것이다.<2009년 1월 23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내용> 그는 스스로 반골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곤 했다.

그해 9월 19일 금의환양한 아시아경기대회파견 선수단이 청와대에 들어가 박대통령에게 귀국인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황의원에게 “국회의원이 메달을 땄으니 훌륭하다. 황의원은 노익장이야”라고 칭찬했다. 1978년 9월 어느날 박대통령은 한국형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 행사장에서 황호동 신민당 의원을 만나 다시 한번 운동이야기를 꺼낸다.

박대통령은 황의원에게 “요즘 운동을 합니까”라고 묻고서는 “이 다음 올림픽에 다시 한번 나가야지요”라고 말해 주변의 국회의원들이 모두 웃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78년 9월 27일자 참조>

황호동 의원은 1936년 12월 대구면 백사마을에서 아버지 황갑규씨와 어머니 김우림씨사이에서 2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성이 거구였던 그는 강진의 역도선수로서, 국회의원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황호동 전 의원은 중1때인 1949년에 처음으로 역도를 시작했다. 그는 거구의 할아버지를 닮아 천부적인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진중학교를 다니며 3학년 때 광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출전할 당시 체격이 신장 180㎝에 80㎏의 체중을 자랑해 좌중을 압도했다.

또 맞는 옷과 신발이 없어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올라가 미군 작업복이나 군복·군화를 사 신었으나 장갑은 구할 길이 없어 평생 끼어보지 못했다는 것도 그와 함께 전해 오는 재미있는 구전이다.

무명의 소년이 국회의원이 되고 아시아 최고의 역사가 되기까지는 강진의 뿌리깊은 역도의 역사가 있었다. 황호동 선수가 역도를 시작하기 2년 전이었던 1947년 1월 초의 일이다. 몸매가 우람하고 힘세 보이는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에 몸을 실고 강진읍으로 들어왔다.

1947년 강진으로 전지훈련 왔던 고려대학교 역도부선수들.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국가대표선수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국가대표팀이자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할 고려대학교 역도부 선수들이었다. 선수들이 강진을 알리 없었고, 강진으로 오는 교통이 좋을 리도 없었다. 요즘도 귀한 일이지만 당시에 국가대표팀이 강진까지 내려온 것 자체가 이변이었다.

국가대표 역도선수들을 강진까지 데려온 사람은 당시 스물일곱살이었던 이형희( 2011년 작고) 전 문화원장이었다. 이원장은 원래 몸이 나약했다. 그래서 역도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강진에 역도를 가르치는 전문가가 있을리 없었다.

이원장은 1945년 10월 역도를 배우기 위해 혈혈 단신으로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역도와 인연을 맺었다. 이 원장은 강진에서 역도를 시작한 최초의 주민이었다.

강진 YMCA를 창립하는 등 강진에서 활발한 지역활동을 벌인 이원장은 역도인들과 꾸준한 인연을 맺어오다 1947년 겨울 국가대표팀이 광주에서 동계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인사차 광주에 올라간 이씨는 깜짝 놀랐다. 국가대표팀들이 광주 금남로 평양여관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좁은 마당 한켠을 훈련장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지붕도 없었다. 이씨는 바로 강진으로 내려 가자고 제의했다.

강진으로 내려온 선수들의 숙소는 지금의 경찰서 아래쪽에 있는 수성당 노인당 이었다. 선수들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장작불을 지펴 따뜻한 방과 따끈한 온수를 제공했다. 연습장은 강진기독교회관. 지금의 세무서 아래 대흥관옆 '뜨락' 자리였다. 아침밥은 모두 이원장이 제공했다.

선수들은 일주일 동안 강진에서 동계훈련을 했다. 강진에서 동계훈련을 했던 고려대학교 역도부팀은 다음해 열린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이들은 강진을 잊지 못해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처를 부산으로 갈 것인지, 강진으로 택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강진 동계훈련̓을 받았던 김성집 선수는 훗날 대한체육회장이 되어 한국체육계를 이끌었다.

고려대 역도팀이 강진에서 동계훈련을 하던 어느날 소년 황호동(당시 11세)이 연습장을 찾아왔다. 거구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바벨을 들어보고 싶어했다. 체력조건을 본 고려대 선수들이 즉석에서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소년이 바벨을 올리자 무거운 바벨이 훌쩍 올라갔다.

이형희 원장이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소년 황호동을 나중에 꼭 고려대로 데려가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황호동선수는 중1때인 1949년 역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6.25가 터지는 바람에 운동을 그만뒀다가 중3때 강진경찰서 내에 마련된 연습장에서 다시 바벨을 들기 시작한다.

그해 열린 전국체전에 처음 출전,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워낙 우람한 체격으로 대성의 기질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강진농고에 입학한 그는 도 대표로 활약하면서 전국체전 등 각종대회를 석권했으며 옛 동계훈련의 인연으로 결국 고려대로 스카우트된다.<계속>

황호동 의원의 약력
 ‣ 대구 백사마을 출생(1936년)
‣ 강진농업고등학교 졸업
‣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 동경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1958년)
‣ 로마올림픽 국가대표 출전 9위   
  (1960년)
‣ 동경올림픽 국가대표 출전 8위
  (1964년)
‣ 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출전
  은메달(1966년)
‣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출전
  (1968년)
‣ 테헤란 아시안게임 은메달
  (1974년)
‣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
  발기위원
‣ 신민당 중앙당 청년지도 국장
‣ 신민당 전남제13지구당위원장
  9대 국회의원
‣ 한ㆍ코스타리카의원 친선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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