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잘 보고, 배 잘 부리고, 길 빠삭하고, 신용 좋고

옹기배 사공의 조건… 그래야 배를 맡겼다
밥짓는 일만하다 하선한 사람들 부지기수

1993년 겨울로 보인다. 김우식 사공이 고깃배로 가득한 부두에서 망연하게 바다를 바라고보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옹기배가 봉황마을 부두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진 = 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19. 칠량 옹기배 사공 김우식의 한평생.>
전쟁이 끝나고 60년대 들어 서도 옹기시장은 여전히 인기였다. 김우식 사공은 1960년대 초반 남의배 사공을 다시 시작했다. 6.25때 부산항로에서 재미를 본 김사공은 이제 남해안 지리를 쫙 끼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도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시장에 여전히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길은 육지와 가까운 길을 택해 배를 몰았다. 봉황을 출발한 배가 완도해역으로 접어들어 장흥으로 들어갔다. 그 길로 곧장 가면 고흥 나로도가 나오고 여수돌산을 지나 경남 남해군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삼천포를 거쳐 통영과 거제도, 진해로 들어갔다. 그 다음이 부산이었다. 가다가 해가지면 배를 적당한 곳에 멈추고 잠을 잤다.

바람이 좋으면 봉황에서 부산까지 일주일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좋은 바람조건일때에 국한됐다. 바람이 작아도 배가 늦게 갔지만 바람이 너무 세도 쉬어가야 했다. 바람이 크면 바다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다는 바람한점 없을때도 많았다. 바람이 없는 것은 옹기배와 같은 돛배에게는 최악의 기상이었다. 이럴때 옹기배는 항해를 포기하고 바람이 일때까지 몇시간 또는 며칠씩 항포구에서 정박하며 바다가 일렁이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생긴말이 '옹기배는 애터질게 없다'란 말이 생겼다. 서두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그냥 편하게 기다린다는 뜻이다. 김우식 사공은 옹기배는 애터질게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일기예보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나 나침반이 없었던 시절, 모든 날씨 판정은 뱃사람들의 몫이였다. 특히 배의 우두머리인 사공의 판단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보며 그날의 항해를 계획했고, 하늘의 색깔과 구름을 보며 기상을 점쳤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몇날 며칠씩 근해항으로 피해서 정박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어촌에는 예전부터 ‘뱃놈은 삼일 일기를 본다’는 말이 생겼다. 뱃사공들이 일기에 민감하고 통달해 있다는 뜻이다. 석양의 해가 벌겋게 떨어지고 구름이 끼면서 작은 무지개가 뜨는 것을 북새라고 했다. 그럴때면 이삼일 안에는 비가 오거나 바람이 쎄게 불었다. 뱃사람들이 가장 믿는 것은 새벽녘 뱃전에 앉아 바람과 하늘을 느끼며 그날의 날씨를 점치는 것이었다. 달을 보며 일기를 점치기도 했다.

“인자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달을 봐가지고 달무리가 있으면 날이 시원치 않제. 날이 좋을라면 말이여, 저녁에 별들이 말이여 깜빡이지 않고 또렷하게 보이제. 날이 궂을라믄 주먹만한 별똥이 뚝뚝 떨어져. 그랑께 사공들은 인자 초저녁에서도 하늘을 처다보고 또 날이새면 새벽에도 쳐다보고 늘 하늘만 처다 보거든.... 그래서 사공들은 경험이 있어갖고 이렇게 생기믄 어떻게 날이 궂더라, 어쩌면 비가 오더라, 어쩌면 바람이 쎄게 불더라 하는 것을 다 알아불제”<칫다리 잡을라 옹구 풀라... 칠량 옹기배 사공 김우식의 한편생.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 69페이지 참조>

그러다가 60년대 후반들어 라디오가 나왔다. 라디오의 등장은 뱃사람들에게 획기적인 항해기술의 발달을 의미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음파가 고르지 못했고 지역을 지날때마다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쉬운일이 아니여서 무용지물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여전히 사공의 일기판단이 최고의 기상대였던 것이다.

1985년 처형의 회갑잔치에 참석했다. 앞쪽 왼쪽에서부터 김우식, 그의 장모, 처형, 아내다.
사공은 배의 왕이다. 배의 안전운항에서부터 옹기를 팔고, 돈을 보관하는 일까지 사공의 책임이다. 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우선 돛배에 관한 모든 상식을 꽤뚫고 있어야 한다. 남동풍이 불때는 닻과 돛을 어떻게 조절을 해야 하고, 바람이 갑자기 바뀔때는 어떤 응급대응을 해야하는지 몸에 베어 있어야 했다. 일종의 경영능력이고 위기돌파 능력이다.

뱃길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외우고 있는 것은 필수였다. 어느 지점에 어떤 암초가 있는지, 어디쯤에 가면 바람이 세지고, 얼마나 가면 바람이 자는지, 어느 섬 주변에 급류가 있고, 어느 항의 간만의 차이가 어느정도라는 것등을 머리에 컴퓨터 처럼 담고 있어야 했다. 이는 시장 정보에 정통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우식 사공은 강진~부산간 뱃길을 지나며 수많은 섬의 이름은 물론 그 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이름, 그 주변의 무인도 이름까지 정확히 맞추며 바닷길을 헤쳐 나갔다.

그뿐이 아니다. 사공이 되려면 어느 지역 어떤날이 정기 장날이라는 것은 기본이고, 어느 섬의 어느 마을에서 어떤 특산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잘 알아두어 수확기에 맞춰 옹기를 팔러가는 것도 큰 기술이었다. 소비자들의 트랜드에 정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마을이나 돈이 많을 때가 따로 있거든. 몇 년 동안 장사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거여. 그러니까 돈이 많은 마을을 찾아 댕기제. 말하자믄 갯마을에는 고기 잘 잽힐때가 돈이 많은께. 이달에 고기가 많이 나오겠다. 석화를 따겠다, 김이 나오겠다면 미리알고 가능거여. 농촌마을에는 인자 보리하고 쌀 수매할 때 쫓아 댕기제. 좌우지간 돈목줄을 쫓아 다녀야 옹기를 많이 폴수 있능께 말이여”<뿌리깊은 나무 민중자서전 19. 81페이지 참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정확한 계산이다. 육지에서 기다리는 선주에게 정확한 계산을 하는 것은 사공의 마지막 책무였다. 배 주인은 배 한배를 팔고 돌아오면 이윤을 얼마나 남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옹기가 정찰가격이 아니였기 때문에 사공이 현지에서 마음대로 가격 흥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공이 100만원 남았는데 50만원만 남았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배가 한두대가 다니는게 아니고, 사공이 한두명 있는게 아니여서 사공이 장난을 치면 배 주인이 언젠가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렇게 나중에라도 사공이 거짓말을 친게 들통나면 배 주인은 다시는 그 사람에게 사공일을 맡기지 않았다.

경상도땅서 ‘옹기사이소’하다가 전라도땅서 그러면
‘저 호로자식이…’혼쭐, 사투리 때문에 여러번 고생


또 마을에 입소문이 금방 퍼져 다른 배 주인들도 그 사람에게 사공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래서 옹기배 사공은 신용이 누구보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김우식 사공은 고향마을에 돌아오면 옹기판매 일보와 판매대금 현황등이 정확히 적혀있는 장부를 선장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이는 신용을 잘 지킨 것이다.

이렇듯 사공이 되기 위해서는 경영능력과 위기돌파 능력, 시장정보에 대한 통찰력, 소비자 트랜드를 읽는 감각, 신용평가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입증 받아야 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아주 철저한 것이어서 밥을 짓는 화장에서부터 사공의 조수격인 조동무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쌓았고 그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만이 배의 최고영자격인 사공이 되었다.

그래서 옹기배만 오래탄다고 해서 누구나 사공이 되는게 아니였다. 배 한척에 3명이 조를 이뤄 타는 배였지만 화장이일나 조동무를 아무리 오래 해도 화장일이나 맡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배에 옹기를 싣고 나가 한달 이상 남해안 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다보면 사투리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여수 인근은 바로 경상도 땅이 붙어 있었다.

특히 화개장터에 가면 개울을 하나두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뉘었는데, 이상하게도 두 지역의 말이 틀렸다. 개울 하나사이로 경상도 지역은 경상도 사투리를, 전라도 지역은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경상도는 누구한테나 ‘이랬나’ ‘저랬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전라도에서 그런말을 하면 ‘반말하는 것이냐’고 당장에 시비가 일었다.

경상도에서 옹기를 팔며  ‘말잔 묻자구마’ ‘이래저래 옹구가 왔다구마’하다 보면 개울 하나 건너서 전라도 땅에서도 ‘옹구 하나 사주라구마’ ‘알겠나’하는 말이 나올때가 많았다. 그러면 김우식 사공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이고 내가 옹기 팔로 와서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 잘못 나왔소. 용소해 주시요”하고 빌어야 했다. 그러면 “예 알았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앞으로 말조심 하시오”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그 시대때에는 요즘처럼 마이크로 “옹기 사시오”라로 방송하고 다닐때가 아니였다. 골목골목 다니면서 “옹기 사이소, 질 좋고 싼 놈 들어왔는께 옹기 사이소”하고 소리지르며 다닐 때였다. 그러다가 전라도 땅에서 “옹기 사이소”라고 했다가는 “저 싸가지 없는 호로자식이...”하며 “몽둥이 찜질 당하고 싶냐”고 소리지르는 사람도 많았다. 참 조심스러운 때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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