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담 스님/ 백련사

메일 한통을 받았다. 동국대 최동순 교수에게 온 메일이다. 그 안에 정명국사 천인에 대한 연보가 적혀 있었다. 놀라웠다. 나는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원묘국사 요세스님은 정명국사 천인에게 의발을 물려줬을까? 정명국사의 연보를 통해서 안 사실이지만 정명국사는 진정국사보다 고작 1살이 많았을 뿐이다. 출가한 해도 1228년 같은 해다. 천인은 24세, 천책은 23세에 불과했다.

천인과 천책은 함께 현관賢關(고려시대 국자감)에서 공부를 했다. 천인은 천책보다 2년 앞선 17세에 현관에 입문을 한다. 그리고 국자감에서 제일석第一席을 차지할 정도로 주변의 인정을 받는다.

그렇지만 무신의 난 이후로 등용의 폭이 좁아진 춘관시에서 번번이 급제를 하지 못해 다른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반면에 진정국사는 18세에 현관에 입문하여 그 다음해 국자감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받고 진사에 오르고 예부시에 급제하여 20세에 벼슬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두 분이 함께 출가를 한다는 것이다. 진정국사의 호산록을 보면 그 때의 사정이 묘사되어 있다.

‘다행히 뜻을 같이하는 두 사람과 함께 남모르게 천리 길을 출발하였는데, 곤경과 위험을 고루 겪었습니다. 40일 만에 비로소 참배하였습니다. 만덕산은 땅이 후미지고, 사람은 드물고 고요하며 가고 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단지 구름 낀 봉우리와 안개 자욱한 섬들이 둘러싸인 것을 볼 뿐이며, 푸르고 푸른 사이에 대나무와 맑은 샘물은 즐길 만하고 상찬할 만합니다. 다만 두툼한 눈썹의 노스님 네댓 명이 문을 나와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천리길 40여일을 걸으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더구나 집안과 주변사람 모르게 나온 출가길이다. 보따리 짐이라도 제대로 챙겼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별수 없다. 옷은 헤지고 먼지는 쌓여 새까만 젊은이들을 미소로 맞이하는 눈썹 두툼한 노스님들! 천인과 천책은 그렇게 만덕산에서 출가를 한다.

천인은 불가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선기禪氣가 있었던 듯하다. 원묘를 참배하고 얼마 되지 않아 속진 번뇌를 떨쳐낸다. 그리고 진각국사 혜심을 찾아 조계의 요령을 터득하고 백련사에 돌아와 보현도량을 결성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렇지만 2년 후 바람처럼 지리산으로 종적을 감춘다. 백련결사도 노스승의 사랑도 운수납자였던 천인의 발걸음을 막지 못한다. 몇 년후 지리산에서 수행을 하고 돌아와 천태교관을 연마하던 천인에게 원묘국사가 의발을 전수하려고 한다.

천인은 능력이 모자라 감당하기 어렵다며 도망을 간다. 스승이 끝내 사람을 보내 강박하고 꾸짖으며 “어찌 배절(背絶)하기를 그리도 경솔히 하느냐.” 하므로, 마지못해 대중의 바람을 따라 백련사를 맡게 된다. ‘나와 남을 다 이롭게 함은 대인大人의 일이고, 구차히 자기만을 위함은 한갓 소절小節에 구애되는 것이므로, 오직 의義를 중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길을 바꾸어 돌아왔습니다.’ 당시의 심경을 토로한 내용에는 천인의 풍모가 드러난다.

천인국사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병에 걸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죽기 전에 원묘국사의 부도와 탑비를 세우는데 혼신의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정작 당신은 “내가 죽거든 후한 장사나 탑 같은 것을 세우지 말고, 지위 있는 이에게 찾아가서 비명碑銘도 받지 말고, 다만 버려둔 땅에 가서 화장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용혈암에 물러나 문을 닫고 10여 일간 곡기를 끊는다. 그리고 마침내 8월 4일에 문도의 제자를 불러서 오늘 떠난다며 마지막 당부와 열반송을 남긴다..
“반륜半輪의 밝은 달과 흰 구름, 가을바람이 샘물소리를 보내는데, 거기는 어딘가. 시방十方 무량의 불찰은 미래의 불사를 다했다.”

몽고의 외침을 피해 상왕산 법화사에 들어가 저항했던 천인국사. 출가한 후로 자신의 글을 베껴 옮기지 못하게 해서 시문의 10중 8, 9가 유실이 되어버린 스님.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 해 비석도 부도도 세우지 못하게 한 수행자. 정명국사 천인의 모습을 현재에 복원하는 일은 아직도 우리의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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