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만드는 코발트 원료, 조선왕조실록 뒷받침

광주시 지방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일본과 국내의 주요 도요지를 돌며 고려청자 재현작업과 강진청자사업소 재건 등을 위해 노력했던 조기정 선생은 2007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강진에서도 조선시대 청화백자 만들었을 증거물
고려멸망 후 청자만들던 도공들 발자취 될 수도
사철 발견은 강진에서 도자기 계속 만들었을 가능성 제시

14세기 후반 고려의 패망과 함께 고려청자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후, 과연 강진에서 청자를 굽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다. 그 엄청난 청자를 생산하던 도공들이 갑자기 땅속으로 꺼졌을리는 없다. 그래서 청자가 쇠퇴한 후로 청자장인들이 옹기를 만들어 인근지역에 판매했을 것이라든가, 백자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들이 있지만 체계적인 연구가 없는 상태다.

1978년 5월 어느날의 일이다. 도예가 조기정 선생(당시 41세)이 세계 최대 집단요지를 형성하고 있는 강진요의 신비를 풀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마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조기정 선생이 도암 수양리에서 가마를 찾고 있을 때였다. 마을의 한 주민이 산위에 3개의 굴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용혈암지 이야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굴을 용굴, 베틀굴, 땅굴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곧장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못했던 회청(回靑)의 원료인 사철(砂鐵)을 발견했다. 조기정 선생은 당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심장이 멎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사철은 코발트 안료다. 조선시대때에는 이를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최고 사치품인 청화백자에서 푸른 색 그림을 만드는 원료가 바로 사철이었다. 청화백자속의 용그림이나 포도송이등이 모두  사철을 원료로한 코발트로 색깔을 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초기에 해당되는 15세기 무렵 청화백자를 처음 만들었으나 회회청이 자체 생산이 안돼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수입을 해서 사용했다. 회회(回回)라는 표현도 페르시아나 아랍상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회청은 당시 금값 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기축) 10월 5일자에 의미 심장한 기록이 몇차례 보인다. 내용은 이렇다. 승정원에서 교지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령하기를, “강진현에서 생산하는 회회청(回回靑) 은 일찍이 채취하여 시험해 보았더니 간혹 진실한 것이 있었다.
 
경(임금)은 널리 방문하여 공사간의 사기를 구워 만드는 때에 모름지기 회회청과 비슷한 사토(沙土)를 써서 시험하여 아뢰라. 주민들이 이 채색을 얻어서 바치면 벼슬을 상으로 주고 베 50필을 상줄 것이니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라” 고 했다.

회회청이 바로 강진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여러가지 시험을 해 본 결과 수입산과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사철이 과연 강진에서 생산됐는지, 다른 광물질을 가지고 회회청이라고 했는지 말들이 많았다. 강진에서도 사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또 이를 활용해서 청화백자를 생산한 가마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경기도광주요 이외의 지역에서는 청화백자생산지를 생산한 곳이 없었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런데 강진에서 사철을 채취한 곳이 발견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 다음은 청화백자를 생산한 가마터를 발견하는게 급선무였다. 강진에서 사철이 나왔다면 청화백자를 생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조기정선생은 “국내 어디보다 가마가 발달한 강진의 사람들이 원료를 가까이두고 자기를 생산하지 않았을리 만무하다”고 판단했다.<조선일보 1978년 5월 30일자>

조선생은 인근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보름간을 헤맨끝에 500m 간격으로 떨어진 두 개의 가마를 찾았다. 하나는 백자파편만 나와 청화백자와는 관계없는 것이였으나 다른 하나에서는 푸른색 띠를 두른 청화파편 50점을 수집했다. 또 사발형 그릇에서 대나무, 난초, 띠무늬를 그린 파편을 발견했다.

조기정 선생은 “표토에서만 파편을 수집했으나 가마를 발굴하면 더 귀중한 자료들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발굴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후 청화백자 가마가 본격적으로 발굴돼지는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가마들이 개간 과정에서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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