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히 잊혀졌다... 그러나 고향에서 글러브를 다시 꼈다

선동렬과 고교야구 라이벌
‘가장 촉망받던 야구선수’

86년 프로야구 은퇴 후
칩거

26년만에 다시 그라운드로 

 
인터넷에서 김태업을 검색해 보면 그런 글이 눈에 띤다. ‘선동렬과 김태업 두 사람은 70년대 후반 희대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선동렬은 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이름석자 정도는 아는 국보급 투수가 된 반면, 또 다른 한명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궁금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선동렬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김태업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난 7일 오후 5시 강진읍 부춘리 강진북초등학교 교정. 전교생이 29명뿐인 학교의 교정에 야구선수들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들린다. 지난해 10월 창단한 ‘북초등학교 야구부’는 9일 여수에서 열린다는 전남선수권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처녀 대회출전이었다. 전남지역에서는 모두 5개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다. 그 선수들이 여수에서 모여 기량을 겨루는 경기였다.

어린선수들 속에 키 큰 아저씨가 한 명 있었다. 김태업(49) 감독이였다. 선동렬의 라이벌. 80년대 초반 고교야구 스타. 기성세대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왕년의 야구스타는 지금 초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을 가르치며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필자도 가물가물한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필자가 중학교 3학년인 1980년이었다. 그때 김태업은 광주상고 3학년 에이스 투수였고, 선동렬은 광주일고 에이스였다. 고교야구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을 때다. 선동렬은 투수로서 굳건한 자리를 유지한 반면 김태업은 투수와 타자부분에서 모두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김태업 선수가 1980년 대통령기 고교야구대회에서 광주일고를 상대로 역투하고 있다.
두 학교가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김태업의 광주상고는 부산고, 신일고, 중앙고등 초 강팀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결승에 진출했고, 광주일고 역시 군산상고, 선린상고, 대전고등 당시 전국에서 수위권을 다투는 팀들을 누르며 결승티켓을 움켜쥐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결승전이  열린 날이 1980년 5월 1일이다. 전남(당시는 광주· 전남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임)은 물론 수도권에 사는 호남출신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결과는 8:2. 광주일고는 선동렬과 차동철을 번갈아가면서 마운드에 올렸지만 광주상고는 결승에 오르기까지 김태업이 3게임을 완투한 결과였다. 혹사당한 것이다.

광주 금남로에서 두 학교 선수들을 환영하는 카퍼레이드가 열렸다.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우승한 광주일고에 많은 박수를 보냈지만 광주상고의 김태업 선수도 그에 못지 않은 갈채를 받았다.

같은해 8월에는 광주상고가 봉황기쟁탈전에서 4강에 올라갔다. 당시 신문기사는 김태업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김태업선수는 무서운 강속구로 마운드를 굳게 지키면서 날카로운 타격 솜씨까지 발휘했다. 키 185㎝ 몸무게 79㎏의 큰 체구인 김태업은 3회전서 1점홈런을 포함한 3타수 2인타를 날렸고 준준결승에서도 승리를 다지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그의 직구는 실업선수 못지 않게 빠른데다 구질이 무거워 선동렬과 함께 올해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고 있다.’

훗날 김태업은 연세대로 진학했고 선동렬은 고려대로 진출해 연고전등에서 밀고 밀리는 라이벌전을 치렀다.

두 사람은 1985년 해태타이거즈에 나란히 입단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선동렬은 프로구단에 안착하며 승승장구한 반면 김응룡 감독의 총애를 받던 타자 김태업은 군대문제가 불거지면서 1986년 입대를 하게 된다. 그게 그가 야구장을 떠난 순간이였다.

2012년 2월 다시 강진북초등학교 교정. 그가 돌아왔다. 야구장을 떠난지 정확히 26년 만이다. 정말 그는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야구선수가 야구를 하지 않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김태업 감독의 해태타이거즈 시절 모습
“누구든 은퇴해야 하지만 나는 너무 빨랐습니다. 야구공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그때 이후 야구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TV에서 중계되는 야구경기도 보지 않았습니다.”

야구와 철저히 담을 쌓고 살았다. 운동을 해야 할 때 하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러웠다. 때를 놓쳐버리니 다시 그 자리에 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은퇴하고 몇 년 동안 겪었던 갈등과 번뇌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를 고통이었다. 중간에 중고등 학교등에서 감독으로 와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렇게 야구와 담을 쌓았다.

생계를 위해 광주에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카페와 일식집을 운영하면서 꽤 돈을 벌었지만 건설업을 하며 부도가 났다. 다시 건설업과 관련된 조명일을 시작했다. 운동했던 덕분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수월했다. 다시 큰 돈을 벌었다. 무서울 것도, 겁날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년 만인 97년 또 부도가 났다. 집도 날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는 인생이었다.

90년부터는 여자소프트볼에 정을 붙여 그 일에 혼신했다. 한편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해서 재기를 꿈꿨다.
광주에서 여자소프트볼을 육성하며 사업을 다시 하던 중에 동문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태업아 후배들 좀 맡아주라”

김태업 감독의 고향은 강진읍 솔치마을이다. 북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 광주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당시에는 강진의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을 때였다. 1969년 강진서초를 시작으로 강진 중앙초, 강진동초, 강진북초 등 총 4개의 학교에서 야구부를 잇따라 창단했다. 하지만 76년 무렵 정부지원이 끊기자마자 강진의 야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후배 키워달라’ 동문들 요청
‘북초등 야구감독’ 수락

스포츠는 초기 집중 육성필요
지역사회, 관심과 지원을

김태업 감독이 북초등학교 야구선수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동문들이 나를 찾아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동문들이 아니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만 흔쾌히 승낙하고 내려왔습니다”

26년만에 다시 야구를 한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또 고향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야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다.

지난해 10월부터 야구부 창단에 들어갔다. 동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이어졌다. 15명의 야구선수들도 모집했다. 목포에서 3명이 왔고 광주등에서 2명이 왔다. 덕분에 학교는 전교생이 29명으로 늘어나면서 폐교위기를 면했다. 학교도 야구부 지원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피칭머신이나 외야팬스등 완벽한 야구장 시설을 갖추었다. 코치도 2명이나 된다. 덕분에 선수들은 동문들의 지원으로 숙식을 하며 코치들로부터 집중 훈련을 받고 있다. 또 조만간에 라이트시설도 설치해서 야간훈련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시설이면 전국 최곱니다. 잘 나가는 서울의 초등학교도 뒤쪽에 그물하나 설치하고 야구부 운영하는데도 많습니다”

문제는 선수들을 모집하는 일이다. 강진에서 많은 선수들을 모집하고 싶은데 선뜻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들이 많지가 않다. 여러 가지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작은 학교에 전학 보내 야구를 가르치다가 중간에 잘못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려하는 부모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을 보내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야구를 하면서 공부를 잘하게된 아이들이 많아요. 모든 훈련은 수업시간 후에 하고 있고 수업시간에는 학생수가 적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집중적인 지도를 해주기 때문에 실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김태업 감독은 북초등학교의 야구부를 반드시 전국 최고의 팀으로 키울 작정이다. 벌써 선수들 중에 샛별이 보이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그 조그만 지역에서 어떻게 야구부를 키우느냐’고 걱정반 비웃음반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북초등 야구부를 번듯하게 키워 남부지역에 이런 학교도 있다는 것을 전국에 알리겠다는 각오다.

“야구팀을 반드시 최고의 팀으로 만들 것입니다. 고향에서 그렇게 할수 있다면 제게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26년만에 야구공을 만진 김태업 선수는 소년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