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가방에 메고 광폭행보, 미국땅도 좁았다

재미한청련 구성 미국 각지에 지부 결성
국제운동단체와 연계활동 지속적으로 전개

극심한 궁핍속에도 성금모아 조국에 송금
1993년 5월 13일 13년동안의 수배 해제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 도착한 1981년 6월 30일 이후 1년 6개월 동안 그의 행적은 가족일부와 밀항을 도왔던 사람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시애틀에서 LA로 거주지를 옮긴 다음 김상원이란 가명을 쓰며 생활했다. 이 기간 동안 윤한봉 선생은 다양한 해외운동가들을 만났다.

또 82년 6월에는 ‘광주수난자돕기회’라는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모임을 통해 돈을 모아 광주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보냈다. 광주수난자돕기회는 모금 활동뿐 아니라 자료집 발간, 5.18 기념행사 후원등도 꾸준히 했다. 이 모임은 88년 6월 해체될때까지 광주로 3만불 이상을 송금했다.

그러던중 82년 12월 어느날 이였다. 광주에서 소식이 왔다. 경찰이 윤한봉 선생이 국내에 있을 때 도피를 도운적이 있는 전북 군산의 이광웅 선생을 그해 10월 연행했다. 이리저리 실타래가 풀리면서 20여명이 줄줄이 붙잡혀 갔다. 밀항을 도운 사람들도 발각됐다.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젖먹이 외조카를 엎고 있던 여동생 경자씨와 남동생 영배(칠량 영동마을 거주. 전 전남도의원)씨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가 두들겨 팼다. 전두환 일당은 ‘윤한봉이 5.18이후 월북해서 밀봉교육을 받고 내려와 지하에서 암약중 체포됐다’는 각본을 만들어 놓고 윤한봉 체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국내운동권 특히 광주·전남지역 운동권을 윤한봉과 연결시켜 일망 타진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989년 봄 어머니 김병순여사가 아들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미국을 방문했다. 윤한봉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망명'에 당시의 감회를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여동생 경자씨가 “우리 오빠는 미국에 망명했어요”라고 말해 버렸다. 경찰은 웃었다. 윤한봉이 경찰의 수사망을 뚫고 미국에 망명할 리가 없다는 것이였다. 경자씨가 다시 말했다. “조아라 장로님이 미국 가셨을 때 오빠를 만나고 왔어요”

얼굴이 사색이된 경찰이 광주로 내려가 윤한봉선생의 밀항을 도운 조아라 여사와 강신석 목사등을 잡아들였다. 모든게 밝혀지는 순간이였다. 아연실색한 노태우 내무부장관이 청와대로 뛰어가는 소동이 한바탕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윤한봉의 문제가 미국과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피해야 했고,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낭패가 알려지는 것을 숨겨야 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연행된 모든 사람들에게 ‘윤한봉이가 밀항 탈출해서 미국에 정치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비밀로 한다’는 각서를 쓰고 모두를 석방하고 말았다.

윤한봉 선생은 이때부터 국내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고 당당하게 윤한봉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생활할수 있었다. 엉뚱한데서 큰 고민거리 하나가 풀린 셈이였다.

82년말 그는 해외운동 10년이란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게 민족학교를 설립한 것이였다. 재미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해서 미국사회에서 긍지를 갖고 살아가게 하고 조국과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 할수 있도록 한다’는게 설립취지였다.

1983년 2월 5일 LA코리아타운에 미주 동포사회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자 미주운동권 센터가 될 민족학교가 설립됐다. 민족학교가 설립된 후 영사관측의 방해공작이 심각했다. 노인회를 비롯한 각종 동포단체를 조직적으로 동원해 모함에 나섰다. ‘민족학교 뒤에는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온 놈이 있다’ ‘민족학교에는 인공기가 휘날린다’‘민족학교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돌고 돌았다. 일반 동포들은 그런 말들을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지지세력들까지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DJ를 비판하는 윤한봉에 대해 버르장머리 없는 빨갱이로 몰아부쳤다. 윤한봉과 DJ와의 불편한 관계는 오랫동안 계속된다. 윤한봉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 5.18까지 보인 DJ의 처신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82년 12월 DJ가 미국을 방문했다. LA에 와서 강연을 했다. DJ가 연설도중 그런말을 했다.

“5.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말을 들은 윤한봉과 민족학교 관계자들이 분노했다.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강연장을 나와 버렸다. 윤한봉은 그의 회고록 ‘망명’에서 “변하지 않았구나. 과대망상증이 심하구나. 5월 영령들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 가셨다는 말인가. 5.18의 의의와 정신을 왜곡하고 모독해도 정도가 있어야지...”라고 썼다.

DJ와의 이런 불편한 관계는 훗날 귀국해서도 이어져 윤한봉 선생이 DJ집권 후에도 정치를 하지 않은 이유와 연결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학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극심한 음해공작을 이겨낸 결과였다.

1983년 윤한봉 선생은 미주 청년운동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83년 12월 30일 2박3일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한 노조건물에서 서부지역 청년대회를 열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민족학교에서 의식화된 LA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재미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다.
 
윤한봉은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 일을 ‘마침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일할 해외동포 청년운동조직이 출연한 것이였다. 미주 최초의 청년운동체가 결성됨으로서 해외운동사, 미주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된 것이였다’고 적었다. 윤한봉이 깊은 뜻을 부여한 조직이였던 것이다.
재미한청련을 86년 8월까지 서부의 시애틀과 중부의 시카고, 덴버, 달라스 지역, 동부의 뉴잉글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DC지역의 한청련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한인사회의 대규모 운동조적이 생겨난 것이다.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서 큰 관심을 가진 또 다른 분야는 국제단체와의 연계운동이였다. 필리핀이나 니콰라과 엘살바도르, 팔레스타인등과 같은 나라는 이미 광범위한 국제연대를 하며 자국의 문제를 국제이슈화하고 있었다.

이에반해 재미한국사회는 그런 운동자체가 없는 상황이였다. 윤한봉 선생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특수한 과제의 해결을 위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 내야하고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과제 해결을 위해 우리도 지원 협력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본격적인 국제외교 연대운동에 뛰어 들었다. 국제외교 연대운동의 핵심은 고국의 문제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였다.

1990년 8월 윤한봉 선생과 재미한청련 회원들이 유엔대표부 건물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윤한봉 기념사업회 제공>
재미한청련은 의욕적으로 황무지를 개척해 나갔다. 우선 홍보 선전 교육용 자료들을 영어와 우리말로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국내 상황을 알리려면 영어전단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다. 또 고국의 현실과 운동을 다루는 ‘KOREA REPORT’라는 영문 기관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해서 20개국의 독자들과 미국내 거의 모든 진보단체들에 보냈다. ‘KOREA TODAY’라는 남북 분단전문 저널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소수민족들을 상대로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공개 강연회도 많이 개최했다.

또 진보적 도시인 버클리시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여 86년 5월을 ‘광주민중의 날’을 선포하게 했고 89년과 90년에는 남북유엔 분리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20개국의 유엔대표부를 방문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85년 어느날 광주에서 연락이 왔다. 5.18 광주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됐으니 모금운동에 호응해 달라는 것이였다. 재미한청련은 1년동안 모금 끝에 2,800만원을 모아 광주로 보냈다.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라고 있는 형편에서 보통 큰 돈이 아니였다. 86년에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하면서 미국에서만 1만1천명의 서명을 받아 역시 조국으로 보냈다.

88년에는 조국의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민족통일 마당집 한돌쌓기 운동에 호응해 캐나다 토론토를 포함한 10개 지역에 추진위를 구성하고 1년 동안 7,000만원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당시까지도 궁핍함을 벗어나지 못했던 재미한총련에게 엄청난 돈이였다.

1987년 4월 17일 드디어 미국정부로부터 정치망명 허가가 나왔다.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지 만 6년만의 일이였다. 윤한봉의 정치적 망명허가는 한국인으로서 처음이였다. 이후부터 윤한봉 선생은 여행허가서를 발급받아 자유롭게 외국도 나갈수 있게 됐고, 신청서만 제출하면 영주권을 받을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됐다.

89년 봄에 팔순이 다된 어머니 김병순여사가 아들을 찾아 미국을 왔다. 그동안 몇차례 전화를 통해서만 목소리를 들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랬다. ‘4남 2녀중 너만 남았다. 너를 결혼 못 시키고 죽으면 저승에 가서 네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뵙겠냐“

아들은 그랬다. “어머니 욕심이 많군요. 5.18때 자녀들을 잃은 부모님들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가 안죽고 이렇게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단호하게 말해 버렸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도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한달정도를 지내시다 돌아갔다.

이후에도 윤한봉 선생의 미국 삶은 핵무기 철수 운동, 새로운 조직구성, 국제평화대행진, 범민련 북미주본부결성, 전두환 노태우 방미규탄시위, 세계인권대회 참가등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점철됐다. 하루도 쉬지 않은 일정이였다. 그는 타고난 운동가였던 같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 민주화운동 13돌을 앞두고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80년 5월 광주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였고 오늘의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조성, 관련전과기록 말소등 명예회복 방안을 밝힌 것이다. 특별담화에 따라 423명의 전과가 말소되었고, 윤한봉 선생 또한 수배자에서 해제됐다. 5.18의 마지막 수배가 해제된 순간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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