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 도체찰사 정분이 탐진에 성을 쌓고 읍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도강현-탐진현 주민들 읍치소 유치놓고 치열한 쟁탈전
문종임금, 삼도도체찰사 내려보내 여론 수렴
강진현 치소, 탐진현→ 도강현→ 도강현 세차례 이동

강진은 1417년(태종 17년) 도강현과 탐진현이 합하여 강진이라는 오늘날 이름을 얻게 된다. 도강현은 강진읍과 성전면 작천면 일원이였고, 탐진현은 칠량과 대구, 마량 일대였다. 이 두 곳을 합쳐 강진현이라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지역이 통합된 이후에도 강진읍성을 유치하는 것을 놓고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강진과 장흥이 통합해서 두 지역이 군청을 어디에 둘것인가를 놓고 마찰을 빚은 것이다.

조정에서는 탐진과 도강 두현을 합해서 두 현의 중앙인 옛 탐진현의 산성을 읍치(邑治)로 삼도록 했다. 옛 탐진현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였다. 그 지점이 어디인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도강현과 탐진현의 중앙지점이였다면 군동의 어느 지역이 될것도 같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쉴새없이 조정에 상소가 올라갔다. 탐진현의 산성은 비좁고 물도 없기 때문에 읍성을 옛 도강현의 송계리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계덕이란 사람을 비롯한 79명의 도강현 사람들이 상소를 올렸다. 송계리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결국 조정에서는 읍치소를 세종 9년(1427) 송계리로 옮긴다.

조선후기 강진의 지도다. 읍치소가 현재의 강진읍으로 전해진 후의 지도이다.
그런데 이곳 역시 문제가 생겼다. 읍치소를 송계리로 옮긴 후 관노비가 나날이 감소하고 3년만에 현감이 다섯 번씩이나 교체되는 기현상들이 벌어졌다. 옛 탐진현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탐진의 토성(토착 성씨)을 가진 최당이란 현감이 읍치소를 다시 가져가려고 ‘백성과 내통하고 공모해서 여러 가지 말을 꾸미어서’ 여론을 어지럽게 했다.

그래서 결국 문종 임금 1451년 11월 삼도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 정분을 강진으로 보내 여론을 듣고 오라고 명령한다.  

정분은 강진에 도착해 도강과 탐진 두 현(縣)의 인민(人民)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면서 “도대체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뻔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강의 사람들은 치소를 송계(松溪)에 그대로 두기를 원하고, 탐진의 주민들은 다시 탐진으로 옮기기를 원했다. 보통 갈등이 아니였다. 정분은 두 지역 주민들의 갈등을 ‘서로 다투고 힐난하여 능히 상하(上下)가 없다’고 문종임금에게 보고했다.

정분은 나름대로 판단한 자료를 함께 올린다. 우선 송계리의 치소를 바로 옮기지 말고 관사나 개조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탐진은 남쪽으로 바닷가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탐진으로 치소를 옮겨서 주민들을 보호하라고 문종임금에게 의견을 냈다.

강진현의 읍치소는 1475년(성종 6년) 현재의 강진읍으로 치소를 옮긴다. 치소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까지 그로부터 24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강진읍의 위치는 옛 탐진현의 자리가 아니면서도 도강현 내에서 위치를 탐진현 쪽으로 많이 이동한 형태다. 

옛 탐진현으로 치소를 가져가려는 주민들의 노력도 집요했지만 읍치소를 결코 내놓지 않으려한 도강현 사람들의 수성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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