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운씨 간첩활동 혐의 끝내 부인

육군소위 증언만으로 간첩죄 적용 ‘총살형’
당시 시대상황 무리한 간첩죄 적용가능성 많아


1949년 8월 12일 김호익 총경을 사살한 이용운씨는 사건 발생 한달 보름만인 그해 9월 30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선고 받는다. 이용운씨의 혐의는 남로당특수별동대원으로서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행위)와 제33조(간첩죄)를 위반한 혐의였다.

이용운은 자신의 간첩혐의에 대해 끝까지 부인하고 변호인들도 이적행위와 간첩죄 적용은 무리가 많다고 주장하며 살인죄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중앙고등군법회의는 검찰의 기소내용에 충실했다.

재판과정중에 나온 증인들도 이용운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사람들 뿐이였다. 이용운을 조사했던 경찰은 증인으로 나와 “피고는 김호익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군 비밀을 탐지하고 수사진을 파괴하려 했다”고 말했고, 장복성이란 육군소위는 “이용운이 신사옷과 노동자옷을 번갈아 입고 육군기갑부대앞이나 방첩부대앞에서 배회하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1949년 9월 30일 이용운은 다른 사람 8명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신문(경향신문 10월 2일자)에 따르면 ‘다른 사형수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이글이글하였고 얼굴이 화끈 붉어져 있었으나 김호익 총경 살해범 이용운은 심문받을 때의 태도와 다름없이 태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날 총살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모두 간첩죄가 적용된 사람들이였다. 이용운외에 8명은 모두 여순반란사건과 관련돼 있었다. 이후 이들중 7명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이용운과 여순반란사건 당시 남로당문화부장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은 김태준이란 사람은 그해 11월 중순경 끝내 총살됐다.

1961년 어느날 열린 고등군법재판소의 모습. 사진작가 정범태씨가 찍어서 전해오는 사진이다.
그럼 강진 병영 출신 이용운이란 사람이 간첩행위를 했는가 하는 점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용운은 자신의 간첩행위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김호익 총경을 사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단지 프락치 사건이라는 이유로 애국자라고 생각했던 국회의원을 체포한 것을 보았고 이러다가는 애국자 전부를 잡을 것으로 생각돼 격분 끝에 김호익을 살해한 것이며 이적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고 누구에서도 지령을 받은 일도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도 재판과정에서 이용운과 남로당의 연계관계를 재시하지 못했다. 이용운이 신사옷과 노동자옷을 번갈아 입고 육군기갑부대앞이나 방첩부대앞에서 배회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육군소위의 증언이 유일하게 이용운의 간첩행위를 뒷받침한 증거일 뿐이였다.

그러나 검찰측 증인이였던 육군소위가 “부대앞에서 이용운이 배회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지금 기준으로 볼때 헛점이 많아 보인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이용운씨에게 무리하게 간첩죄가 적용된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여러 가지 있다. 우선 당시 이승만 정부는 극도의 체제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회반민특위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친일 경찰이나 친일정치인들도 좌불안석이였다.

이승만 정권이 본격적으로 반격전을 펴고 친일인사들이 기사회생한 계기가 국회프락치사건이였다. 그런데 국회프락치사건을 색출한 김호익 총경이 누군가에 의해 사살된 것이였다. 김호익 총경 사망사건은 이승만 정권에게 좌익의 실상을 알리는 호기였다.

사건이 일어난 4일 후 김호익의 경찰장이 있었는데 장례위원장이었던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은 담화를 발표하면서 김호익의 피살을 ‘남로당과 민애청 분쇄에 주력해 온 데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행위’로 규정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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