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방인인데 왜 군사법정에 세우는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76-2에 있었던 경기도청 옆 서울시경 별관건물. 이용운씨가 김호익총경을 사살했던 현장이다. 1989년 철거돼 현재는 녹지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용운 군법회의에서 극렬 항의
경찰, 군사기밀 탐지했다는 이유로 군검찰에 넘겨

1949년 8월 12일 병영 출신 이용운씨가 잘나가던 경찰관 김호익 총경을 사살했던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그는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남로당이나 북한과의 연계를 전면 부인했다. 그래서 변호인들은 이용운의 간첩행위는 무죄이고 살인죄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사법정은 이용운이 2년간 공산당교육을 받았으며 군사기밀 수집지령을 받아 방첩대등의 군사기밀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검찰측의 공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해 이용운을 총살형에 처했다. 이용운은 곧바로 총살에 처해 졌다. 그의 시신이 어떻게 됐는지 알수 없다.

그의 말대로 ‘조실부모하고 일찍이 고향을 떠나 일본과 중국등지를 돌아다녔다’고 진술한 것으로 봐서 특별한 친척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그의 행동과 죽음은 아무런 조명도 받지 못한채 공산당과 밀통한 빨갱이로 50여년 동안 뭍혀 있었다. 경찰역사에 김호익 총경은 국회에 스며든 공산당(국회 프락치)과 공산당 총수 박헌영이 지하에 심은 세포조직들을 일망타진한 빨갱이 잡는 명수였으며, 그 빨갱이의 흉탄에 맞고 쓰러진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재판과정을 보면 몇가지 관심을 끄는게 있다. 우선 민간인 신분인 그가 왜 군법회의에 회부됐느냐 하는 점이다.

1949년 9월 27일 ‘김호익 서울시경찰국사찰주임을 살해한 남노당중앙별동대원’ 이용운에 대한 중앙고등군법회의가 대법원 특설공판장에서 열렸다. 원용덕 준장이 재판장이였고 대령 두명이 배석 법무관으로 참여했다. 검사는 대위였고 변호사 역시 대위였다. 당시 이용운은 초조한 가운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용운의 죄목은 국방경비법 제33조의 간첩행위와 동법제32조위반죄였다. 검찰측이 피고의 범죄요목을 낭독하고 있을 때였다. 이용익이 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지방사람(강진사람)인데 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하는가.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이 공판에 응할 수 없다”

이용운의 외침은 경비 군인들에 의해 즉각 제지됐다. 변호인측이 검찰의 기소사실에 대해 간첩행위는 인정하지 못하고 김호익 사찰주임을 살해한 것만 범죄사실로 인정한다고 답변했다. 이때 또 다시 이용운이 일어나 “나는 간첩행위를 한 적이 없다. 설령 간첩행위를 했더라도 왜 내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소리쳤다. 분위기가 하도 소란스럽자 재판장이 10분 휴정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용운이 간첩행위에 대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당시 해방직후 사회분위기에서 군사재판이라는게 살벌하기 이를때 없는 재판이였기 때문에 이용운은 군사법정에 회부된 것 자체가 자신을 극형에 처하기 위한 수순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경찰국사찰과 김윤쾌 경위는 재판관이 피고를 군에 넘긴 이유에 대해 “피고 이용운은 김호익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군비밀을 탐지하고 수사진을 파괴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증언했다. 그가 군비밀을 탐지했기 때문에 군 검찰에 이용운을 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조직의 최고 스타로서 간첩색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호익 총경을 살해한 범인을 경찰이 단지 그가 군비밀을 탐지했다는 이유로 직접 조사하지 않고 군 검찰에 넘겼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다.

또 이용운은 그날 왜 김호익 총경 한명만 사살했던 것일까. 김호익 총경이 살해된 1949년 8월 12일 서울중앙청앞 경기도청 사찰분실에는 꽤 여러명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로당의 지시를 받고 경기도청 사찰분실에까지 접근했다면 김호익 총경을 죽이고 그 옆의 사람들도 충분히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였을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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