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박동마을 출신 이용운, ‘打共의 一人者’ 김호익 사살

당국 “남로당특수별동대장, 국회프락치 사건 보복 범행” 총살형
이용운 “나는 남로당도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은적도 없다”

1949년 8월 12일, 서울 중앙청 앞 경기도청 옆에 자리잡은 시경 중앙 사찰 분실. 국회프락치사건 해결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김호익 총경이 피로해진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잠시 쉬고 있던 중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남로당에 포섭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미군철수법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으로 이문원, 노일환의원등이 징역 10년, 나머지 의원들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해방후 곤경에 처해 있던 친일경찰들의 입지를 살려준 사건이자 훗날 반민특위 해체를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김호익 총경은 이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일계급 특진을 한 상태였다.  
 
김호익 총경이 시경중앙 사찰분실에서 쉬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이성주의 소개로 왔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청년은 이미 그러한 방법으로 검문을 통과해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였다. 청년은 명함을 건냈다.

김호익 총경이 청년이 내미는 명함을 들여다보는 순간, 청년이 재빨리 권총을 꺼내 들었다. 방아쇠는 바로 당겨졌다. 탕 소리와 함께 김호익 총경이 피를 흘리면서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 온 분실직원들이 김호익을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절명하고 말았다. 

저격 후 달아났던 청년은 중앙청 앞 버스 정거장에서 추격한 형사들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 출신의 36세 이용운이란 사람이였다. 그는 곧바로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총살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36세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진 출신의 그가 왜 ‘간첩잡는 경찰’ 김호익을 사살했던 것일까. 사건이 일어난 4일 후 김호익의 경찰장이 거행됐다. 경찰전문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김호익의 영결식에는 내무장관 김효석과 장경근 차관, 치안국장, 농림장관, 국회부의장 등 각계 명사 및 경찰소방대, 민보단, 대한청년단, 보도연맹 등 우익반공 청년 단체 및 사회 단체 대표 수천 명이 참석하여 '멸공 투사' 김호익을 추모했다. 경찰에게는 ‘타공(打共)의 1인자’를 잃은 충격이 그만큼 큰 것이였다.

장례위원장이었던 김태선 시경국장은 담화를 발표하여 김호익의 피살을 남로당과 민애청 분쇄에 주력해 온 데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보복 행위로 규정했다. 경찰에게 김호익의 피살은 공산주의자들의 보복행위였고, 이용운은 그들의 행동대원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용운은 최후진술에서 “단지 프락치 사건이라는 이유로 애국자라고 생각했던 국회의원을 체포한 것을 보았고 이러다가는 애국자 전부를 잡을 것으로 생각돼 격분 끝에 김호익을 살해한 것이며 이적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고 누구에서도 지령을 받은 일도 없다”고 진술했다. 변호사들도 간첩행위는 없었다며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대해 검찰은 이용운이 남노당특수별동대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용운이 2년간 공산당교육을 받았으며 군사기밀수집지령을 받아 방첩대등의 군사기밀을 내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신사복과 남루한 노동자 옷을 번갈아 입으며 삼팔선지대 사정등을 남로당에 보고했고, 군정보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김총경을 죽였다고 했다. 결국 검찰의 주장은 재판부에 의해 그대로 받아드려져 검찰의 구형대로 총살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용운은 병영 박동리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고 일찍이 외지로 떠돌았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용운은 1949년 9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나는 조실부모하고 역경에서 자라나 일본 중국등을 유랑할 때 나라없는 백성의 설움을 절실하게 체험하고 해방과 동시에 귀국한 후 혼란한 정국을 대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당시 신문들의 보도를 보면 그의 키는 다섯척, 그러니까 150㎝ 정도의 작달막한 키에 적은 얼굴에 올백한 머리가 특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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