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를 영원히 볼 수 있도록 박제 표본을 만들라 하시오”

그림 강화경
그림 강화경

 

서전병원 원장과 외과의사, 미 8군 소속 군의관 크린트 대위 등 네 명의 의사가 들어섰다. 
최고의 미국 의사인 그들은 서구의 몸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런!”
“목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혹이 여러 군데 보이는군요.”
그러고는 청진기로 진찰을 했다. 네 명의 의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눴다.       
“이 작은 혹들이……. 글쎄 무슨 병일까요?”
“…….” 
“먹지를 못하니 소화기에 이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등딱지도 많이 얇아졌는데요.”
의사들의 진찰 결과는 병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서구의 몸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위급한 상태라는 결론만 나왔다.
의사들은 진단을 내놓은 후에도 대통령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대통령의 관심을 받고 있는 거북이라 함부로 다룰 순 없었다.   
대통령이 의사들에게 물었다.
“서구 몸에 있는 혹을 떼어 낼 수는 없소?”
“할 수는 있지만 도중에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수술을 해도 아무 효과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외국인이라 수술이 더 꺼려졌다. 만약의 경우 수술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나라 사이에 번거로운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서구가 아프다는 소문을 듣고 국민들도 뒤에서 속살거렸다.
“그 거북이 대통령의 운을 지켜준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서구와 운명을 함께 할 수도 있겠네요.”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서구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서구의 몸에 솟은 작은 혹들은 불길처럼 온몸으로 번졌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날은 1956년 8월 1일.
서구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지 한 달 만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나이는 사백 살 정도. 
크기는 4척 4치.
서구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시 해수가 되어 태평양 바닷속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구의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과 말이 사라졌다. 한참 후에야 대통령은 비서를 불러 말했다. 
“서구를 영원히 볼 수 있도록 박제 표본을 만들라 하시오.”
“예, 각하.”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똑같아야 하오.”
“알겠습니다, 각하.”  
대통령은 죽은 서구의 몸이지만 함께하고 싶었다. 움직이지 못해도 옆에만 있어 주면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렇게 수산시험장으로 전달됐다.
부산의 수산시험장에서는 널리 이름난 박제사를 찾아 나섰다. 박제사를 구한 직원들은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제사는 서구를 데리고 표본 제작실로 들어갔다. 박제를 하는 방법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박제사는 서구 몸의 길이를 부분별로 재었다. 그걸 종이에 적었다. 등껍질, 배딱지, 다리, 목 등.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까? 서구의 배딱지가 박제사의 손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등껍질도 서서히 벗겨졌다. 문화재 수리 기능자이기도 한 박제사는 옆으로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수산시험장 직원들은 옆에 서서 완성되어 가는 서구의 박제 표본을 바라봤다.
“서구야, 괜찮아?”
어느 직원이 물었다. 
“…….”
서구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숨을 쉬지 않으니까. 
박제가 끝나자 곧 경무대로 서구의 소식이 전해졌다.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말했다.
“그래요? 서구의 박제를 이곳으로 보내라 하시오.”
“예, 각하.”  
대통령은 박제가 되어 찾아온 서구를 반갑게 맞았다. 
“서구야, 네가 이렇게 내 곁으로 왔구나.”
대통령은 마치 살아 있는 거북을 대하듯 혼잣말을 했다. 서구는 새 생명을 받았다는 듯이 대통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데려와서 내 곁에 두고 싶었건만, 이제야 경무대로 왔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서구의 눈빛에 대통령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구만 곁에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래서일까?
1960년 3월 15일에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에 뽑혔다. 네 번째인 셈이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두 번은 헌법을 고쳤고, 이번엔 또 바르지 못한 방법을 택했다. 부정선거였다. 바로 3・15 부정선거. 한 사람이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만큼 더 욕심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네 번이나 잇달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자 국민들은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4월이 되자 국민들이 드디어 거리로 뛰쳐나왔다. 성난 분노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대통령도 점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집무실 한쪽 나무 받침대 위에 앉아 있는 서구 앞에 섰다.
“서구야, 이제는 너랑 헤어질 때가 온 것 같구나.”
대통령은 붉은바다거북의 등을 어루만졌다.
“네가 숨을 멈췄을 때, 그때 나도 욕심을 버렸어야 했었나 보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불러 지시했다. 
“우리 서구를 부산의 수산시험장으로 데려다 주시오. 서구에게는 거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 될 것 같소.”
대통령은 다가올 자기의 앞날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오래오래 서구를 잘 돌보라 하시오.”
“각하, 알겠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대통령 물러나라는 목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다. 4월 19일엔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쓰러졌다. 
1960년 4월 28일.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들었던 경무대를 쫓겨나듯 떠나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머물지도 못하고 도망을 가듯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시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4. 할아버지가 되어        
그 후 오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머리칼이 허옇게 된 정상원은 나이가 들어서도 학마을에 머물렀다. 6・25전쟁 때 사라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옛집을 지키며 살았다.  
짧은 장마가 끝나자 무더위가 시작됐다.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해 정상원은 마당으로 나왔다. 반바지 차림으로 후박나무 그늘 밑 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엔 아침에 배달된 신문이 들려 있었다. 2011년 7월 7일 오후였다. 
정상원은 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 기사를 읽었다. 큰 기침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할 줄을 몰랐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국립 수산과학원 내 수산과학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랑받던 바다거북 박제 표본이 공개된다…….

신문에 실린 서구의 기사였다. 이승만이 미국 하와이로 떠난 후로는 서구의 소식도 함께 잊혀졌다. 서구의 이야기가 다시 신문에 실리다니, 이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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