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들의 함성소리 가까이서 들려오고

 

마을 뒤쪽으로 투구봉이 있고, 목포로 넘어가는 밤재가 있다. 원래 마을은 월평저수지에 있었으나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왔다.

마을 이름인 제전은 원래 저전(楮田)에서 비롯됐다. 저(楮)는 닥나무 저자이다. 마을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전이 제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근처에 정유재란 의병 기념비가 있다.
마을 근처에 정유재란 의병 기념비가 있다.
마을회관이다.
마을회관이다.

 

주변이 웅장하다. 마을 서남쪽에 별뫼산이 있다. 정상부터 등성이의 동쪽까지 온통 바위로 이뤄졌다. 중간지점에 고깔 모자처럼 생긴 고깔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일제강점기때 막은 별뫼방죽이 있다.

밤재는 목포로 넘어가는 재의 이름이다. 정유재란때 왜적을 무찌르던 의병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이던 이순신은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지휘권은 원균에게 넘어갔다.
 

마을의 서쪽이다.
마을의 서쪽이다.
멀리 별뫼산 봉우리가 보인다.
멀리 별뫼산 봉우리가 보인다.

 

그런데 원균이 패전을 거듭하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었다. 이순신은 순천을 거쳐 장흥 회령포진, 마도진을 거쳐 해남 우수영에서 마침내 9월 16일에 명량대첩을 이끌었는데, 그때 이순신 휘하에 강진 출신 의병들이 다수 참여했다.

당시 전라우수사가 바로 강진 출신 김억추였고 그 휘하에도 강진 사람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명량대첩에 강진 사람들이 큰 힘을 보탰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남쪽이다.
마을의 남쪽이다.
잘 꾸며진 옛집이다.
잘 꾸며진 옛집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명량대첩 이후 목포와 법성포로 올라가 버렸다. 그 사이에 왜군들은 해남, 영암, 강진 등지에 상륙하여 명량에서의 패배를 보복하기 시작했다.

영암, 강진, 해남의 접경 지대인 밤재에서 성전면 금당 출신의 김덕란(金德鸞) 등 70여명의 의병이 매복하여 영암에서 강진으로 향하던 왜군 수백명을 기습 공격하여 격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의병군은 200여명으로 확대되어 다시 영암 해암포에 상륙한 왜군을 유점동에서 요격하여 사력을 다했으나 대부분이 전사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이들의 순절을 기념하기 위해 현장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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