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관찰사 이연손에게 조운선 건조의 일에 대해 유시하다<상>

“강진현에서 조운선 100척을 만들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시대 세금을 거둬 들이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왕조 유지의 자금이 전국에서 거둬들이는 세곡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세곡이 호남과 충청의 곡창지대에서 확보된 것은 물론이였다. 세곡은 각 지역에 설치된 해창을 통해 배로 실어 한양으로 가지고 갔다. 그것을 조전(漕轉)·조만(漕輓)·해조(海漕), 조운(漕運)이라고했다. 강을 이용할 경우에는 수운(水運) 혹은 참운(站運), 바다를 이용할 경우에는 해운(海運)이라 하였다.

강진에도 지금의 도암 만덕리 가는 곳에 조선시대에 걸쳐 오랫동안 해창이 운영됐다. 조선시대 세곡중에서 전라도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엄청난 것이었다.

인조때의 조사에는 전국 5도 총세액 8만2천840석 중에서 50%에 해당되는 4만1백여석이 전라도의 세곡이 차지할 정도로 전라도 지역의 세곡 비중이 높았다.

가을에 거둬들인 세곡은 봄이되면 배가 선단을 이뤄 일제히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경상남도 진주에서부터 출발하는 선단은 순천과 고흥, 보성, 장흥을 그치면서 점점 더 큰 선단이 이뤄졌다. 강진을 거쳐 해남, 목포, 영광에 이르면 100여척의 거대한 선단이 형성됐다.

이렇게 선단을 이루어서가면 사고를 그만큼 줄일 수 있었고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세곡을 보호할 수 있었다. 1년에 한두차례씩 이뤄지는 이 큰 국가행사를 관할지역수령들이 경호업무를 폈다. ‘한 나라의 정치에 있어서는 조운(漕運)의 일이 가장 엄한 것이다’는 말은 조선왕조의 칙령과 같은 것이였다.

그러나 여전한 문제는 사고였다. 세종 25년(1443) 6월에는 충청도 비인현 법도에서 전라도 조전선 99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77척은 바람에 떠밀려 가고 11척은 침몰된 대형해난사고였다. 99척중에 온전한 배는 11척 뿐이였다. 충남 태안의 안흥량 일대에서는 조선 헌종원년(1835)~고종 19년(1882) 기간 동안 190건의 조난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고가 많은 만큼 조운선을 확보하는 것도 조선왕조가 사활을 거는 일이였다. 1460년 7월 세조임금이 전라도관찰사 이연속에게 유시를 내린다.    

“조전선 100척을 8월 초 1일부터 시작하여 만들겠으니, 여러 고을로 하여금 선장(船匠) 100명, 목공 200명을 뽑아서 징발하게 하여 부안현 변산과 강진현 완도에 이르도록 하라. 또 도사(都事)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되, 모든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하라”

다만 장인(匠人)의 정원(定員)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때 전선(戰船) 숫자가 200여척이였다. 조전선 100척은 엄청난 숫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7월초에 유시를 내리면서 8월 초1일부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선장과 목공을 모으라고 했다. 세조임금은 다음해 봄에 세곡을 실어나를 배가 거의 없다는 것을 파악한 듯 싶다.

장소는 강진현과 부안현이 결정됐다. 배를 만드려면 가장 필요한게 목재다. 목재는 미리 준비해 두었거나 화급하게 확보했을 것이다. 부안은 소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강진현 역시 칠량 삼흥리와 대구 천태산 자락등에서 큰 소나무가 많이 나왔다. 배를 만드는 장소는 완도의 어느 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재는 칠량 삼흥리를 비롯한 강진현 곳곳의 산에서 뱃길을 이용해 공급했을 것이다. 조운선 제작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조운체계는 혼선을 거듭했으나 세조 때를 전후하여 관선중심으로 체계화된 것으로 본다. 아마도 이때 제작한 100척의 조운선이 큰 힘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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