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비산 351고지 초토화작전 작전장교로 참전… 진지탈환 큰 공헌

‘반창고 계급장’붙이고 전투현장으로
 월비산 탈환작전“야간전투해야 승리” 주장
 극적인 진지탈환… 작전능력 크게 인정받아

1950년 7월 2일 대전에서 열린 육사 10기 임관식은 울음바다였다.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했다. “국가가 1년이라는 수학연한을 통해서 베풀어 주신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간이 의식을 통한 임관식이라 할지라도 국가와 민족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우리 10기생 생도중 134명만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지 못하고 입원중인 20명과 전사했거나 우리들의 진격만을 고대하고 있을...”

통곡 소리 때문에 몇 차례 중단된 답사가 끝나자 생도 11개 생들이 반창고를 찢어 선배들의 철모에 붙여 주었다. ‘반창고 계급장’을 단 것이다. 그 후로 10기생들은 반창고 계급장으로 통했다. <장창국 저. 육사졸업생 참조>

대전에서 소위로 임관한 김재명 장군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된다. 북한군은 파죽지세였다. 북한군은 남침을 시작한 지 4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빼앗아 버렸다.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지휘로 한강선을 방어하였으나 결국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하고 7월 3일 수원 방향으로 철수를 해야 했다. 8월 중순들어서는 대구와 부산만 빼고 모두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굴욕상태였다.

김재명 소위는 낙동강전투등에서 전투부대를 거쳐 수송담당장교로 활동했다. 부산에서 장병들을 최전방으로 투입하는 호송을 맡았다. 장병들을 기차를 이용해 전선으로 보낼때다. 장병 인원파악과 탑승, 기차의 출발등이 모두 김재명 중위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전선에서 어느덧 2년여의 세월의 흘렀다. 김재명 소위도 옛된 소위에서 이제 대위가 됐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통일전망대에 있는 351고지 전투전적비 모습이다. 김재명대위는 이 전투에서 작전장교로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재명 대위는 5사단 35연대 제2대대에 작전장교로 투입된다. 1951년 10월 10일 강원도 고성군 월비산. 이곳은 금강산과 고성군 일대 곡창대대를 통제할 수 있는 공격 발판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여서 국군과 인민군이 개전 초기부터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날 향로봉을 중심으로 적과 대치하고 있던 육군수도사단이 고성군일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월비산 정복이 필수적이다는 판단을 내렸다. 선재공격이 시작됐다. 월비산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일곱차례의 전초전지 쟁탈전이 계속됐다.

선재공격을 시도한 육군수도사단은 월비산 핵심 진지인 351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월비산 전투가 일단락되면서 동부전선의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수도사단은 월비산 지역을 11사단에 인계하고 11월 10일 호남지역으로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월비산이 중요한 것은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11월 18일 저녁 북한군 9사단 86연대 1개대대가 어둠이 깃든 월비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해 왔다. 11사단 병력은 사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지만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인수받은지 불과 8일만에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해가 바뀌었다. 월비산은 여전히 적의 수중에 있었다. 그해 1월 23일 육군본부는 월비산전투 임무를 육군본부직할부대로 1군단 소속이였던 5사단에게 맡기게 된다. 이에따라 5사단 35연대 국군이 월비산 전투에 전격 투입됐다. 35연대는 네차례의 걸쳐 역습을 감행했으나 351고지는 요지부동이였다.

1952년 7월 13일. 35연대가 월비산에 온지도 5개월이 됐다. 351 탈환임무를 받은 35연대 제2대대장 정인순 소령이 대대작전장교 김재명 대위를 대동하고 203고지의 연대 관측소로 급하게 움직였다. 그곳에는 군단장과 사단장, 부사단장, 사단일반참모, 연대장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6.25당시 국군들이 진지내에서 피난을 내려오는 주민들을 지켜보고 있다.<육군 자료사진>
군단장은 정소령을 보자마자 “지금 당장 공격하라”며 추상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정소령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이미 김재명 작전장교와 협의를 끝낸 내용이였다.

첫째는 야간공격을 실시하자는 것이였다. 35연대 3대대와 27연대 2대대가 주간공격을 감행하다가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정소령은 또 2대대는 약 5개월 동안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병 모두가 지형에 익숙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야간공격을 하면 승리에 자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재명 작전장교의 보충설명이 이어졌다.    

작전이 시작되는 일몰을 전후해서 항공폭격을 실시해 주고, 중박격포중대를 포함한 지원포병 지휘관이 우리 대대관측소에 위치해서 근각적인 근접지원을 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단장은 정소령과 김재명 작전장교의 요청을 모두 수용했다.

7월 13일 오후 6시 30분을 전후해서 F-51 전투기의 목표 공격이 시작됐다. 밤 8시경에는 사단 양동계획에 다라 2톤트럭 10여대가 송현리~ 대강리구간을 5~6회 왕복했다. 차량들은 북상할 때만 전조등을 켜게했다. 북한군에게 대대적인 병력이 투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였다.

8시 30분이 되면서 본격적인 전투병력의 공격이 개시됐다. 351고지는 쌍방이 집중한 포격으로 발목에서 무릎까지 빠져들었다. 여기저기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난관을 극복하고 공격중대가 드디어 351고지 정상을 확보했다. 7월 13일 밤 12시 상황이였다. 대대장과 김재명 작전장교의 작전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전투였다. 

351고지 탈환상황을 확인한 사단에서는 30분후에 공병 1개 소대를 351고지에 급파했다. 마대 1만개를 지참하게해서 진지를 보수했다. 때는 음력으로 5월 21일이였고 하늘에는 구름한점 없는 날이였다. 하현달이 선명해서 진지보수하기에 참 좋은 밤이였다.

당시 전투에서 인민군 9사단 제86연대는 1개대대 규모 병력이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군군 35연대도 이에 못지 않은 전사 68명 부상 461명, 실종 103명등 632명의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전투중에 북한군은 82밀리 박격포를 포함해 122밀리 곡사포등 각종 포탄 7,180여발을 발사했으며 국국 35연대는 81밀리 박격포를 비롯해 155밀리 곡사포탄등 각종 포탄 2만6,394발을 소모하는 대 접전을 치렀다.

이러한 수치는 351고지 일대의 넓이가 1.2㎢ 정도인 점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화력이 집중된 것이였다. 그 안에서 벌어졌던 혈투 역시 실로 처절한 것이였다. 월비산에서 벌어진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1952년 7월 5사단 35연대 2대대의 고지탈환은 가장 치열했던 싸움이자 혁혁한 전과로 꼽힌다.

한편으로 가장 많은 피해 역시 피할 수 없었던 35연대는 임무교대와 함께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다시 복귀한다. 김재명 대위는 당시 전투를 계기로 작전통으로서 군내에서 능력을 인정 받는다.

훗날 주월남사령부정보참모, 한미연합기획단장, 유엔사정전위한국대표, 육군본부작전교육참모부장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군 경력은 6,25때 그가 세운 작전공훈과 무관하지 않았다.

351고지는 그 후로도 적군과 아군간에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있을 때는 마침 월비산이 적의 수중에 있을 때였다. 아쉽게도 월비산은 북한땅이 되어 휴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35연대가 월비산에서 세운 무공으로 강원지역 일대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남한땅이 된 것은 한국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대 전과였다. <한국전쟁전투사. 월비산 351전투 참조>

그렇게 6.25 전쟁은 3년여 동안의 참상을 뒤로하고 1953년 7월 27일 끝이났다. 전쟁은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남겼다. 그러나 종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 필요성을 절감한 미군은 국군장교들을 자국으로 데려가 교육을 시키기로 한다. 김재명 소령은 김종필 전 총리등과 함께 1차 교육생으로 미국유학길에 오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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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名異人 김재명 장군

‘육사 2기 김재명 장군… 강진 옴천출신
중장전역, 병무청장· 교통부장관등 역임

육사 10기인 김재명 장군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주 혼동된 인물이 김재명 전 교통부 장관이다. 김재명 전 교통부장관 역시 강진 옴천 출신인데 한자도 김재명(金在明) 장군과 이름이 똑같다. 김재명 장군보다 육사 8년 선배이다. 2009년 6월에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육군사관학교 2기인 김재명 장관은 1군단장을 거쳐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제2대 병무청장, 원호처장을 역임했고 80년 제26대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80년 청조근정훈장, 85년 동탑산업훈장을 각각 받았다.

6.25 전란중에는 개전 초기 1사단 11연대 3대대장으로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 감우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8월에는 6.25 전쟁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대구 다부동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부동 전투가 한창일 때 김재명 소령의 11연대 1대대가 미 25사단 27연대의 좌측 능성을 엄호하고 있었다. 적들은 인해전술로 공격해 들어왔다. 1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고지에 급식이 며칠째 끊겼다. 병사들이 이틀째 물한모금 먹지 못하고 고립됐다. 그런 와중에 밤낮없는 격전이 계속됐다. 김재명 대대장은 후퇴를 결심했다.

미8군사령부가 즉각 백선엽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들을 엄호하고 있던 11연대가 후퇴하면 미군들도 철수를 해야겠다는 것이였다.  백선엽 장군이 즉각 11연대가 주둔한 곳을 짚차를 몰고 갔다. 그곳에서 김재명 대대장을 만났다. 백선엽장군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나갔다.

“모두 앉아 내말을 잘 들어라. 그동안 여러분 잘싸워주어 고맙다.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후퇴하면 곧 망국이다.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면 안된다.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곧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김재명 소령도 용감하게 앞장서 부대를 지휘했다. 김재명 소령의 3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재 탈환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경향신문 1988년 7월 28일자 참조>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 전투 승리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본격적인 대 북한군 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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