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전 순천향대 교수 (작천 이마마을 출신)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존재 근거와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많은 철학과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 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유교의 이기론(理氣論), 불교의 공(空)과 색(色), 힌두교의 브라만(Brahman, 범梵)과 아트만(Atman 아我), 그리스의 철학의 이데아(Idea 원본, 본질, 형이상학)와 코피아(Copia 사본, 현상, 형이하학), 기독교의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creation)의 개념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의 三間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필자는 이해했습니다.

천부경의 삼태극(三太極;무극 태극 황극)은 삼간(三間;공간 시간 인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간은 존재(存在) 자체인 무극(無極)을, 시간은 음과 양이 동(動)하기 前의 태극(太極)을, 인간은 음과 양이 발동(發動)하여 창조된 삼라만상을 관리하는 황극(皇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교의 뿌리가 주역이고, 주역의 뿌리가 천부경이데, 그 첫 머리가 일시무시일석삼극(一始無始一析三極)입니다, 무(無)는 무극(無極)을, 일(一)은 태극(太極)을, 석삼극(析三極)은 일(一)인 태극이 세 개로 나누어진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의 황극(皇極) 활동을 의미합니다.

유교의 이기론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야기된 이황(1501-1570)의 이기 이원론(二元論)과 이율곡(1536-1584)의 이기 일원론(一元論) 논쟁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유교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인간과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당기고 움츠리게 하는 음(陰)의 기운과 밀고 당기는 양(陽)의 기운 즉 기(氣)의 작용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송나라(960-1276)에 와서야 이(理)의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주돈이(1017-1073)의 태극도설로써 이(理)와 기(氣)의 유기적 결합이 되었습니다. 즉 이(理)는 절대계의 본질인 정(靜)적 공간개념(陰)으로, 기(氣)는 현상계 변화의 동적인 시간개념(陽)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의 공(空)과 색(色)은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설명하는 주요한 개념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려면 불교에 많은 영향을 준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변설(轉變說)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空)과 색(色)의 관계를 전변설은 공변시색(空變是色) 즉 본질이고 순수하고 창조주인 공(空 브라만)이 변화(變化)하여 인간을 포함한 현상계인 색(色 아트만)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아트만(我)인 인간은 창조주 브라만에 종속된 열등하고 오염된 존재로 인식됩니다.

이것은 일방통행적 이원론적 사고이며 그리스철학의 이데아(Idea 형이상학)와 코피아(copia 형이하학)의 2분법적 사고와 유사합니다. 인간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본질의 세계(Idea 空)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염된 자신(copia 色)을 정화하여 브라만(空)에 합일하려는 노력(色變是空)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브라만교의 전변설과는 달리 부처님께서는 연기론(緣起論)을 설(說)하셨습니다. 연기의 법칙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하므로 저것이 生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멸(滅)하므로 저것이 멸(滅)한다는 것입니다.

즉 조건이 결합(結合)하면 生하고, 조건이 이산(離散)하면 滅하는 것으로 현상계를 보았습니다. 현상계는 항상 변화하니 無常하고, 조건에 의지하여 생멸(生滅緣起)하는 허상(虛像)이므로 무아(無我)여서, 공(空)인 색즉시공(色卽是空)입니다.

본질의 세계인 절대계(空)는 이데아가 존재하는 靜的 공간(空間)이며, 시간(時間)의 動的 환경 속에서 因緣따라 생멸하는 현상계(色)가 펼쳐집니다. 즉 공즉시색(空卽是色)이지요. 이것은 전변설의 일방통행적 이원론적 사고로부터(色變是空, 空變是色), 쌍방통행의 一元論的 사고(色卽是空 空卽是色)로 바뀌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공(본질)과 색(현상)을 전변설의 二元論인 우월적-열등적 관계, 주(主)-종(從) 관계 그리고 청정(淸淨)-오염(汚染)의 관계로부터 일원논적 연기(緣起) 관계인 중도(中道)로서, 현상계인 色은 다르나(不一) 본질인 空은 등(等=같음) 이어서 하나(不異)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화엄 四法界도 절대계와 현상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개념입니다. 이법계(理法界)는 본질인 절대계를,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지칭합니다. 현상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다름(不一)의 현상계와 같음(不異)의 절대계를 연기와 중도로써 연합하여 장애(障碍)없는 삶을 사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법계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입니다.절대계에서는 본질이 등(等=같음)이므로 이미 이이무애법계(理理無碍法界)가 실현되어 있고, 事法界인 현상계(인간+사물)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가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자재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경지가 되어야 하며, 수행의 최종 목표입니다.

공자의 학맥을 이어받은 맹자는 방심(放心)과 득심(得心) 그리고 수심(守心)을 언급하셨습니다. 절대계의 본질인 의식을 놓쳐서 현상계의 망념인 분별심 즉 無明으로 가득찬 마음이 방심입니다.

분별심과 無明인 무의식을 초월하여 본질인 의식의 마음을 득(得)하고(得心), 그 마음을 지키는(守) 수심(守心)이 현상계를 사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목표라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에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심하겠다는 그 마음도 놓아서(다시 放心하여)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자재 하도록(鷹無所住 而生起心) 강조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절대계인 공간을 존재의 본질(理)인 성부로, 현상계에서 성부의 뜻을 실현한 인간을 성자로, 그리고 절대계의 뜻이 현상계에서 시간을 재료로 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힘(氣)을 성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 즉 복수로 사용되었으나 동사는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삼위가 따로 존재하지만, 하나인 삼위일체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中道개념과  유사하며, 성부를 법신불(體), 성자를 화신불(相), 성령을 보신불(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 중 혹여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시는 분들이 계신지요? 그 존재 불만족이 고전과 주요 종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해소될 수 있는 작은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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