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서구야 이제 여기서 편히 지내거라”

그림 강화경
그림 강화경

 

사람들은 다 함께 기눅굴 웅덩이로 갔다. 헤엄치고 있던 서구가 잠시 물 위로 올라왔다. 물속으로 들어간 남자들이 유리 만지듯 서구를 조심조심 붙잡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서구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상원은 다가가서 서구의 붉고 딱딱한 등을 어루만졌다. 
“잘 가.”
상원은 서구를 몰래 바다로 보내 주지 못했다. 혼자서는 서구를 들 수도 없었고 그런 행동을 할 용기도 부족했다. 이제 서구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떠나게 되었으니 바다로 돌아가기는 영영 틀려져 버렸다.
“아프지 말고.”
반쯤 감긴 눈을 뜨며 서구는 상원과 눈맞춤을 했다. 상원은 서구에게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 다시 만나자. 내 얼굴 기억하고 있으렴.”   
바닷물이 밀려오자 고기잡이배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경찰관까지 합해서 다섯 명의 어른들이 서구를 그 배로 옮겼다. 서구는 잔득하게 얌전했다.
갑자기 배의 난간으로 황색 부리에 흰 꼬리를 단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끼룩. 끼룩. 끼룩. 
서구가 물었다.  
“길을 잘못 들었던 날 만났던 갈매기?”
갈매기는 굵고 쉰 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나 떠난다, 부산으로.”
“그래? 앞으론 부산 갈매기를 만나겠구나.”
“가 봐야 알지.”
“그럼 잘 가.”
갈매기도 서구와 인사를 나눴다. 갈매기는 먹이를 찾아 훨훨 마량 쪽으로 날아갔다. 서구를 태운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0. 대통령을 만난 서구 
선착장에 서서 정문기 박사는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서울로 올라갈 참이었다. 학마을을 떠나기 전에 정 사장과 인사를 나눴다.
“서구도 볼 겸 언제 부산에 한 번 오십시오.”
“그래야지요.” 
“어르신, 그동안 협조를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조심해서 잘 가십시오.”
 
서울에 도착한 정문기 박사는 곧바로 경무대로 향했다. 비서실 직원은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께선 지금 안 계십니다.”
“어디 가셨어요?” 
“예, 서구 보러 부산으로 가셨습니다.”    
“이런, 제가 모시고 가려고 왔는데.”
정문기 박사는 대통령의 성급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부산으로 갈걸. 얼마나 서구가 궁금했으면 그 사이를 못 참고 가셨을꼬.’
놀라기는 수산시험장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대통령이 방문을 했다. 그것도 거북을 보러 왔다. 서구가 부산에 먼저 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산시험장 책임자가 대통령을 안내했다. 대통령은 큰 수족관에 들어 있는 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족관 안을 느릿느릿 기어 다니던 서구가 머리를 들었다. 
“서구가 각하께 인사를 하는 모양입니다.”
직원의 말에 대통령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서구가 들으라는 듯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진즉부터 보고 싶었다.”   
대통령 앞에서 서구는 뭉툭한 입으로 조개를 부수어 삼켰다. 조개가 부족함 없이 들어왔다. 서구는 그 중에서도 새조개와 꼬막이 마음에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대통령은 만족스레 웃었다. 
“서구야, 이제 여기서 편히 지내거라.”
수족관 안에서는 누구도 서구를 괴롭히지 않았다. 대통령은 자리를 뜨기 전에 직원들에게 말했다.
“서구를 잘 부탁하오.”
“예, 각하.”
수산시험장에서 살게 된 서구는 조개를 배불리 먹었다. 서구의 식사를 맡은 직원은 매일매일 어리둥절해 했다.
“서구가 엄청나게 먹는데요.”
“그래요?”
서구는 하루에 6kg에서 12kg의 조개를 먹었다. 이가 없지만 탄탄하고 뾰족한 턱이 있어서 조개껍데기를 뜯어 내고 알맹이만 꿀꺽 삼켰다. 그 조개를 구입하는 돈이 하루에 5천 원에 달했다. 1949년에는 5천 원으로 80kg인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우리 서구가 매일 쌀 한 가마니씩을 먹는 셈이네요.”
“그러게요.”  
“바다에서 그대로 살았으면 이런 밥값이 왜 필요하겠어요?”
수산시험장은 서구의 밥값 때문에 즐거웠던 마음이 점점 걱정으로 변해 갔다. 지난번 대통령이 다녀갔을 때만 해도 서구를 보면서 모두들 손뼉을 치며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땐 이렇게까지 서구의 식비가 많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어느 덧 해가 바뀌었다. 별 탈 없이 서구는 수산시험장에서 살아갔다.
1950년 3월 초에는 백성욱 내무부 장관도 서구를 만나고 싶어했다. 
“작년에 각하께서 부산을 다녀오셨는데 이번엔 나도 서구를 보러 왔소.”
벚꽃의 꽃망울이 아롱거리는 봄날이었다. 내무부 장관이 부산의 수산시험장에 왔다. 수족관에 갇힌 채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서구를 보며 백 장관은 이름을 불렀다. 
“서구야!”
구슬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네가 날마다 오천 원씩 나랏돈을 먹으면서 지내는 게야?”
직원들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우리 서구가 대단하구나.”
그때 직원 하나가 부탁을 했다.
“장관님! 서구의 밥값 좀 어떻게…….”
“그럽시다.”
“장관님, 지금 당장 안 되나요?” 
“얼마나 필요합니까?”
“우선 900만 원(2021년 기준으로 2억 7천만 원) 정도면…….” 
직원이 말끝을 흐리자 내무부 장관은 큰 소리로 웃었다.  
“알았습니다.”
“만세! 우리 장관님 만세.”  
“올라가서 각하께 말씀 드리고 당장 내려 보내겠습니다.”
수산시험장 직원들은 싱글벙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민거리였던 서구의 밥값이 쉽게 해결되었다.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이 다녀간 후 부산 시민들도 자주 수산시험장을 찾았다. 서구는 이제 모래밭에서 모래 때문에 울지 않았다. 등껍질에 올라탄 사람들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인기는 날로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서구는 혼자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여행을 같이했던 꼬마 거북들을 떠올렸다. 그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갔을까. 바다 밑에 쌓인 쓰레기들은 아직도 그대로 있겠지. 보고 싶다, 하늘하늘 물결 따라 흔들리던 바다풀들.

11. 전쟁의 비극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40분, 북한군이 대포를 쏘며 38선을 넘어 내려왔다. 서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종로에 살던 용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함께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전방을 지키는 군인들은 토요일 밤에 외출을 많이 나갔다. 농번기라서 사흘간 휴가를 받은 군인들도 있었다. 모두들 평화로운 일요일이라 생각했다.
북한군의 도발 소식은 여기저기에서 경무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선전포고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종종 벌어지는 가벼운 충돌 정도로만 여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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