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전 순천향대 교수(작천 이마마을 출신)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잃어버린,쫓겨난 낙원, 1667)과 복낙원(復樂園 Paradise Regained 회복된,되돌아온 낙원,1671)은 영국의 시인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작한 책입니다.

그는 왕권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주장한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왕정복고 후 실명(失明)상태에서 저술한 역작입니다, 필자는 두 책의 이름을 빌어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인 복낙원을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천지(the heavens and the earth)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항상 현재의 카이로스Kairos의 절대적 시간)와 달리, 창세기의 太初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할 시간(크로노스 Kronos의 상대적 시간)과, 하늘들(heavens, 일층天 이층天 삼층天)과 지구라는 공간(空間)을 창조하시고, 그곳에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것들(빛 바다 육지 식물 태양 달 별 새 물고기 동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라는 낙원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 낙원에는 생명나무(tree of life)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가 있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선악과善惡果)는 절대 먹지 말도록 하였으나,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고, 그곳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낙원을 잃어버린 실낙원(paradise lost)에 살게 되었습니다(현재 우리의 삶).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善惡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선과 악을 분별(分別)하여 아는(是非를 가르는) 분별지(分別知)를 의미합니다. 현상세계에 살면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물을 습관적으로 분별하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 등이 상존(常存)합니다.

그것이 다양한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고통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 original sin),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12연기(緣起)의 첫 시작이 무명(밝지않음)이고, 끝이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태어남(生)과 죽음(死)으로부터 기인한 고통의 근본 원인이 무명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분별함(유위有爲)이 없이 알아차려서(無爲,無分別知), 무명과 원죄의 은산철벽(銀山鐵壁;銀으로 만들어진 산과 鐵로 만들어진 벽에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분별하는 습관으로부터 기인한 원죄와 무명의 은산철벽을 넘어 회복된 낙원(복낙원;즐거움이 상존하는 회복된 에덴동산)과 극락(極樂;지극한 즐거움이 상존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부처님의 공생애 前과 後의 삶을 통하여 그 실마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前에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하나님의 영, 성령 臨함), 성령의 인도로 광야(wilderness)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태복음 4장). 첫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입니다.

40일을 금식하신 後 극도의 허기진 상태에서도, 먹거리(음식)에 대한 에고(ego)의 본능적 분별심을 떨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신 그분의 영성을 깊이 묵상해 봅니다.

이것은 '먹음직한(good for food)' 선악과(창세기 3장 6절)에 대한 유혹(시험)을 분별하지 못한 아담과 하와와 비교되는 장면이며, 요한일서(요일 2장 16절)에서 지적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무분별지)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분별지)인 '육신의 정욕(the lust of the flesh)'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보암직한((pleasing to the eye)' 선악과(창 3장 6절)와 요한일서의 '안목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는 자유롭지 못했지만(분별지에 사로잡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수 있는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입니다. 이것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desirable for gaining wisdom)' 선악과(창 3장 6절)와 요한일서의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분별지) 많음을 자랑하고, 그 지혜로 천하만국을 다스려도 결국 헛된 한바탕의 꿈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공생애 前 성령의 인도로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시고(하나님 사랑), 그 後에는 죽기까지 이웃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거룩한 삶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의존하여 광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분별지 극복의 하나님 사랑), 삶 속에서 이웃 사랑을 통한 무분별지를 실행하여 하나님 나라인 낙원을 이 땅에서 회복(복낙원)해야겠지요.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창; 3장 9절)에서, 선악과를 먹은 後, 추방당하여 고통으로 가득한 유위의 현상세계(실낙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영원히 살 것을 염려한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하셨으나, 성경의 끝인 요한계시록 끝장(계;22장)은, 회개하고 돌아온 복낙원 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BC560-BC480 추정)는 29세에 출가하시어 6년 고행 수련 끝에 깨달으시고(연기와 중도), 그 後에는 80세에 열반하시기까지 중생(衆生)들을 위한 삶(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삶이었습니다.

6년의 수행은 2년의 마음수행과 4년의 고행을 통한 몸 수련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마음 수행의 결과 선정에 들면(入 禪定) 번뇌가 없고 생각이 고요하나(상대적 선정), 선정에서 나오면(出 禪定) 분별하는 번뇌의 고통이 다시 반복되는 한계를 경험하시고, 몸을 혹사하는 4년의 고된 수행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은 몸과 마음수련의 기존의 방법들을 내려놓고(止), 7일 동안 고요히 정좌함으로써, 분별지로 갇혀 있던 내재(內在)된 불성이 회복되어(복낙원), 12연기와 中道를 大覺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연기와 중도는 아리안족의 인도 침략이후로, 정착된 우파니샤드 철학인 브라만(본질)과 아트만(현상)의 일방통행적 이원론적 사고(色變是空,空變是色)로부터, 쌍방통행의 일원론적 사고(色卽是空,空卽是色)로 바뀌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고통이 많은 유위와 분별의 현상 세계에서, 그 고통도 본질의 세계(무위와 무분별의 낙원, 극락)로 되돌아오기(낙원의 회복=복낙원)를 바라는 절대자의 배려로 생각하실 수 있는 따뜻하고 풍성한 겨울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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