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칼럼에 강진과 관련된 재미있는 글이 나왔다. 일제때 병영면장을 했던 조화두(趙禾斗)란 사람이 6·25 때 좌익들에게 걸려 골짜기로 끌려갔다.

총살 직전에붉은 완장을 찬 20대 젊은 청년이 조화두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소리를 질렀다. “조 면장, 저놈은 아주 악질이니까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붉은 완장의 이 청년은 조화두를 끌어내어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주 세게 귀싸대기를 두어대 갈겼다.

그런 다음에 100여m 떨어진 수풀 속으로 끌고 갔다. “아버님 어서 도망가십시오!” 그 붉은 완장 청년은 조화두의 아들 친구였다. 배가 고팠던 아들 친구 붉은완장이 평소에 면장 집에 오면 면장 부인은 밥상부터 차려줬다.

광주리에 먹을 것을 넣어 두었다가 아들 친구들이 오면 푸짐하게 먹이곤 하였다. 6·25 때 위기 상황에서 그 은덕을 갚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용헌의 지인인 조현재(66)가 들려 주었다고 한다. 조화두의 손자다. 가족 대대로 전해진 감사함의 사연이었던 것이다.  

병영은 6·25때 갈등이 크고 깊었다. 빨치산 전남도당이 있는 장흥 유치가 지척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연이 많았다.

3개월 전 강진일보 사무실에 50대 남성 2명이 찾아왔다. 인천에서 왔다는 이들은 형제였다. 아버지에게 은혜를 배푼 병영면장의 후손들을 찾고 싶다고 했다.

사연은 그랬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였다. 피란을 내려와 인천을 거쳐 대전을 지나 병영까지 내려왔다. 병영 거리를 서성이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혀 유치 본부까지 끌려갔다. 다행히  풀려 났으나 오갈데가 없었다.

무작정 면사무소에 찾아가니 면장이라는 분이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 먹여주고 재워 주었다. 시장 주변에 적당한 일자리도 소개해 주어 병영에서 몇 개월을 살았다. 부친은 20여년전 작고하며 그때 그 병영면장의 후손을 꼭 찾아 보라고 유언했다.

자식들이 정황없이 살다가 이제야 강진을 찾았다고 했다. 두 아들의 표정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기록을 보니 6·25때 병영면장의 이름은 제12대 조동근이다. 

조화두·조동근 두 면장이 클로즈업되며 교차 된다. 어려운 누군가를 도와주면 복을 받는다는 상식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연말연시에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이 많다. 옛  병영면장들의 따뜻함이 필요한 계절이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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