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수인산이 요즘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강진에서 단풍을 구경할 수 있는 산들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수인산 꼭대기가 으뜸이다. 

수인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고 한다. 한번은 밖에서 볼 때 그 험준함에 놀라고, 일단 정상에 올라가면 요새안에 놀랄만큼 큰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이다.

수인산성은 병영성을 보좌하는 성으로서 기능은 물론 조선시대 왜구들이 쳐들어 오면 사람들의 피난처로 활용됐다. 갑오농민전쟁때는 농민군의 피신처였다. 전라병영성이 가동될 때는 이곳에 30여명의 군인과 군관, 관속들이 상주하는 군사주둔지였다.

지금도 수인산성주변에는 수인산성의 책임자인 별장이 상주하던 관사터가 있고, 암자터가 두 개나 된다. 암자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수인산 정상 일대에 상주하는 인구가 50여명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그럼 이들은 어떻게 이곳에서 살았을까. 수인산성에는 우물터가 세 개나 있다. 하나는 북문쪽에 있고 하나는 관사터 뒤에 있다. 또 하나는 병풍바위 절벽 바로 부근에 있다. 가뭄이 심할 때도 3개의 샘 중에 두 개의 샘에 물이 고여 있다.  

30여명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혹시 부족한 물은 수인산성에 배치된 2명의 급수군(給水軍)이 마을에서 가져다 날랐다. 식량은 정기적으로 병영성에서 공급받았고, 암자는 스님들이 산을 내려가 탁발을 했다.

수인산성은 전라병영성에 오는 수 많은 묵객들이 다녀가는 단골 코스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인 이하곤은 1772년 수인산에 오르는데 산중턱까지는 남여(藍輿)를 타고 간다. 남여는 의자가 달려 있는 조그만 가마다. 그는 수인산 정상에서 바라 보는 풍광을 이렇게 읊었다.

‘석문암 앞에 아슬아슬하게 바위가 서 있는데 문과 같이 마주보고 있으며 절벽 낭떨어지에 임하고 있어 시야가 넓고 탁 트였다. 만덕산 모든 산이 구름 사이로 출몰하고 바다빛이 어슴푸레 밝아 바라보니 하나의 띠같으며 모래언덕에 있는 병영성이 달과 같이 둥글며 인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더욱 기이했다.’

지금 수인산에 오르면 아슬아슬한 바위에서 붉은 단풍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가을 시야가 확 트인 풍광이 우리를 반긴다. 이 가을, 수인산에 가보자.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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