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이 지금도 마을주민들과 세월을 보낸다

 

작천면 소재지에서 영암∼광주 방면으로 3㎞정도를 직진하면 고인돌의 유적지답게 마을 입구에 2m가량 높이의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구상마을을 볼 수 있다.

구상마을은 마을 앞으로는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성뫼산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전통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골마을이다.
 

마을입구에 황대중 장군을 모시는 양건당이 있다.
마을입구에 황대중 장군을 모시는 양건당이 있다.
마을에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에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구상마을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을 앞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사장나무 밑으로 흩어져 있는 21기의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마을의 역사가 선사시대 중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거주가 이루어졌었다는 것을 가늠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고인돌은 사장나무에서 마을 방향으로 남서∼북서 방향으로 3열로 밀집되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속에 대부분의 고인돌들이 훼손돼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오래된 한옥이 숲속에 숨어 있다.
오래된 한옥이 숲속에 숨어 있다.

 

21기의 고인돌 중 거북이 형국을 한 고인돌이 있는데 이 고인돌의 모습을 마을 이름으로 지정한 적도 있을만큼 구상마을앞에 있는 고인돌들은 마을의 상징이다.

고인돌군과 함께 구상마을의 큰 자랑거리는 임진왜란 충신 황대중 장군이다. 지난 15세기경 임진왜란의 충신인 황대중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양건당 충·효 정려각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마을주민들로부터 계속 구전되어오는 황 장군의 일화가 있다.

황 장군은 자신의 모친이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를 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자 자신의 왼쪽 허벅지살을 베어 끓여드려 모친의 병을 낫게 했다는 내용이다.

고택의 골목이다.
고택의 골목이다.

 

그리고 황 장군이 정유재란에 참전해 전사를 하자 황 장군의 애마가 황 장군의 장사를 지낼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고개만 떨구고 있다 3일장이 끝난 직후 숨을 거두었다.

말의 충정(忠情)에 감동한 주민들은 황 장군의 묘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말의 충심을 기리기 위한 마총(馬塚)을 만들어 현재까지 존치되어 오고 있다. 

구상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국이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마을 지명은 조선시대 전까지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구승(龜昇)마을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말 아홉개의 고인돌이 마을의 복이라는 뜻인 구상(九祥)마을로 개칭되어졌다고 한다.

구상마을 주민들의 최고의 자랑은 마을의 협동심이다. 구상마을은 마을 총회, 동계, 마을울력, 품앗이 등의 협력조직들이 아직까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특히 마을총회나 동계와 같이 마을의 대·소사의 계획을 세우는 행사에는 마을주민들이 한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동참해 마을의 앞날을 같이 걱정한다.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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