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규동 박사/ 다산미래원장

한국천주교 창립자로 받들어지는 이벽(李檗)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윗두미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조(德操)이고, 호는 광암(曠庵)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그는 당시 조선이 유교적 폐단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의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를 탐독했다.

그것은 그의 현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책들이었다. 당시 한문으로 된 서양 책들은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종교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벽은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확산 시킬 수 있는   기반으로 서구 정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을 기반으로 1777년에 이미  광암은 소장학자들과 소그룹 활동을 통하여 하늘 세상과 인성(人性)등에 대하여 토론도 하고, 성현들의 윤리서와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책들을 학습하였다.

이때부터 이벽은 이미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서학의 교리연구에 전념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779년 권철신, 정약전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강학회를 열었는데, 이벽은 이 때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들에게 전했고, 이로써 훗날 우리나라에서 천주교신앙운동이 자생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783년 겨울 광암은 친구인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서학을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올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1784년 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천주실의, 기하원본 등 많은 서학서들과 십자고상(十字苦像)과 성화(聖畵) 등, 천주교 관련 물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에 돌아온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서 이미 천주교 교리에 심취해 있던 자신을 비롯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 청년 유교 지식인들이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광암은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에 몰두하며 복음전파에 나섰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산과 이벽의 만남은 새로운 정신세계를 개척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다산의 정신세계를 바꾼 이벽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다산이 쓴  그의 형 정약전의 묘지명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갑진년(1784) 4월 15일에 맏형수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벽(이덕조:李德操)과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이벽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 선중씨(先仲氏)의 묘지명(墓誌銘), 다산시문집 제15권
 
다산 정약용은 이벽으로 부터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듣고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은하수가 끝없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이처럼 다산은  이전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민생이 도탄에 빠진 사회, 신앙의 갈등 현상이 팽배한 사회, 사상적 다원화 현상이 점증된 조선의 유교사회가 사회적으로 개혁의 욕구가 강하게 솟구치는 때였다.

바로 이 무렵 천주교는 부패한 세상을 척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신진세력과 민생의 새로운 정신적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끝없는 당파싸움은 다양한 학문적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기 보다는 천주교를  정치적 탄압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결국 다산은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천주교를 빌미로   땅끝마을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다산은 18년 유배생활 속에서도 위국애민의 정신으로 600여 권의 저술을 통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가 되었다.

200여 년 전 다산 정약용은 한국천주교 창립의 성조인 광암 이벽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한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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