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주적은 빈대였다. 생노병사를 초월한 스님들도 빈대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숲속에서 사람의 피를 맛 본 빈대들은 집중적으로 스님들을 공격했다.

수도승들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스님들이 절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다’는 말이 있지만 스님들이 빈대가 싫어서 절을 떠나는 지경이 속출했다.      

강진군 마을역사 자료를 보면 ‘빈대절터’란 지명이 여기저기 보인다. 칠량 삼흥리 계곡에 빈대절터란 지명이 있고, 도암 봉황마을에도 똑같은 ‘빈대절터’란 곳이 있다. 모두 빈대 때문에 문 닫은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 성전과 대구, 옴천등에도 ‘빈대절터’가 있다.

군동 화방마을 뒷산에 있는 화방사는 원래 신라시대 학자 고운 최치원이 비파산에 세운 고운사라는 절이었다. 그러나 어느때 빈대가 많아서 문을 닫고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병영 백양마을에는 보다 적극적인 이야기기 전해 온다.

마을 뒤편 탑골에 백목암이란 절이 있었다. 빈대가 극심했다. 참다 못한 스님들이 절에 불을 지르고 떠나 버렸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게 아니라 빈대 잡으려고 절간을 아예 태워버렸다.

군동 금곡마을의 동쪽 들판, 그러니까 군동에서 금곡사로 올라가는 벚꽃길 바로 오른편 들판의 이름이 빈대들이다. 사연이 이렇다. 금곡사에 빈대가 들끓어 스님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어느해 큰 비가 내려 계곡이 범람하자 스님들이 법당을 아예 쓰러뜨려 버렸다. 빈대를 잡기 위해서였다. 금곡사 계곡물에 빈대떼가 떠내려가서 아래쪽 고랑에 가득찼다. 금곡마을 들판이었다. 이후 그 곳을 빈대들이라 불렀다.

얼마전 영국의 과학 매체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빈대를 완벽히 피하려면 숲 속 오두막을 사서 절대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이 말은 빈대가 깊은 산속 절간에서도 창궐한 역사가 흐르는 ‘빈대절터’를 잘 모르고 한 얘기다.

아무튼 빈대가 다시 우리곁으로 다가왔다. 해외유입으로 추정되는 빈대들이 대학 기숙사등에서 발견돼 확산되고 있다. 1970년대 박멸된 것으로 알려진 빈대다.

그러나 빈대는 언제 어디서나 창궐할 수 있다. 면역력도 길렀다고 한다. 빈대는 늘 그런 식이다. 빈대도 낮짝이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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